3호선 버터플라이 [Nine Days Or A Mill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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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버터플라이
Nine Days Or A Million
(2009/쌍나팔 뮤직)
8.3


01. 티티카카
02. 무언가 나의 곁에
03. 깊은 밤 안개 속
04. Nine Days
05. 왠지, 여기, 바다


3호선 버터플라이의, 비록 풀렝쓰는 아니다만 그래도 5년 만의 반가운 새 EP [Nine Days Or A Millon]을 수차례 돌려 듣다 문득 간만에 그들의 옛 작업들이 듣고 싶어졌다. 길게는 몇 년간, 짧게도 한두 달간은 듣지 않았던 음반들이다(그러고 보면 한두 달에 한 번이라도 꺼내 들으면 꽤 많이 찾는 디스크기는 하겠다만). 특히 데뷔 음반인 [Self-Titled Obsession]은 스무 살 넘은 이후로 꺼냈던 적이 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생각해보니 2000년도에 나온 음반, 지금으로부터 무려 9년 전이다. 그때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어렸을 적, 3호선 버터플라이를 좋아한다고 종종 떠들고 다녔다. 물론 [Self-Titled Obsession]이나 [Oh! Silence]를 정말로 자주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는 그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녀야 되는 줄 알았을 뿐이다. 말하자면 당위였다. 그러나 실제로 3호선 버터플라이를 정말로 좋아하게 된 것은 [Time Table]이 발매된 이후였다(역설적으로 [Oh! Silence]를 정말로 좋아하게 된 것도 [Time Table]이 발매된 이후이다). [Oh! Silence]까지의 3호선 버터플라이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담아낸 것 이상의, '태도'나 '미적 가치' 등을 추가로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면 [Time Table]부터는 그렇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삐뚤빼뚤 원래 그래>로부터 <스물 아홉, 문득>, <사랑은 어디에>를 거쳐 <할머니가 피었어요>와 <김포 쌍나팔>로 이어지는 전반부는 여지없이 훌륭한 것이었다. 마치 신기한 만화경을 보는 듯, 다층의 시간/공간 레이어들이 입체적으로 버무려진 모양새가 사뭇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2009년 말, 나는 그들의 새로운 EP [Nine Days Or A Million]을 듣는다. 음반을 플레이 시키자마자 우리를 맞는 리드미컬한 기타 리프, 똑 부러진 디스코 리듬이 도드라지는 <티티카카>다. 흠 잡을 구석이 없다. 아니, 좋다. 신이 난다. "티티카카 / 어떤 사람이 살까 / 티티카카 / 어떤 물고기들이 놀까"라는 노랫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미'보다 먼저 귀에 들어오는 것은 티, 티, 카, 카, 말 자체의 말맛이다. 운율감이다. 티, 티, 카, 카는 그 의미를 전달하기에 앞서 일단 디스코 리듬에 착 달라붙는다. 덕분에 <티티카카>는 군살 없이 매끈하다. 우리는 잡념 없이, 그저 하나의 감정에만 집중하면 된다. 잠깐, 잡념 없이? 그렇다, 잡념 없이. <티티카카>의 경우에서라면 그 감정은 '유희'의 감정이다. 흔들어주면 된다. 그다음 트랙인 <무언가 나의 곁에>에서도 마찬가지, 통시적인 전개에 있어서나 공시적인 레이어들의 병합에 있어서나 무엇 하나 음악의 흐름, 감정의 흐름을 배반하는 경우가 없다. "잊지 않고 ㅎ / 다음 날엔 ㅌ" 같은 노랫말에서도 일차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청각적 효과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트랙마다 편차가 있을지언정, 최소한 마지막 트랙인 <왠지, 여기, 바다> 전까지는 거의 그렇다.

좋고 나쁨을 따지려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3호선 버터플라이가 달라졌다'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을 뿐이다. 적잖이 시간이 흐른 만큼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겠다. 그러나 그 변화가 근본적이라면 주목할 만하다. 잡념 없이 듣는 3호선 버터플라이는 낯설다. 이전까지의 작업에서 3호선 버터플라이의 기본전략은 결코 단수화/단층화가 아닌 복수화/복층화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2002년에 작업한 [Oh! Silence]에 실린 <식민지>에서 3호선 버터플라이는 농도 짙은 기타 노이즈 위로 "미국애들 싫어"와 "boys be ambitious"를, "no way"와 "but show must go on"을 병치시켰다. ”미국애들 싫어"라 외치면서 동시에 미국말로 노래하는 화자의 모순, 길은 없지만 쇼는 계속 되어야만 하는 역설. <식민지>는 [Oh! Silence]를 통틀어 가장 적극적으로 3호선 버터플라이의 '입장'을 표출한 트랙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입장이란 가능한 입장 중에서도 가장 네거티브한, '입장 없는 입장' 혹은 '입장을 정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웹진 [weiv]의 신현준은 [Oh! Silence]가 나올 당시 가졌던 3호선 버터플라이와의 인터뷰 표제를 <'식민지 록 음악인'의 정처없음의 자의식>이라 붙였다. 적절하다). 당시의 병치란 물리적인 병치였다. 이는 즉, 각 레이어 간의 거리를  좁히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 고로 [Oh! Silence]는 조화롭지 않았다. 2004년의 [Time Table]은 여러 면에서 훨씬 포지티브해진 작업이었으나 레이어 간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들의 근본적인 전략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Time Table]의 전술이었다(그런 의미에서 [Oh! Silence]까지는 다소 애매한 지점이 남아있었다 말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전술은 특히 중반의 두 트랙, <할머니가 피었어요>와 <김포 쌍나팔>에서 두드러졌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비롯된 텍스트들을 배치하는 와중, 그들은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에 포커스를 맞추었고 그 결과로 더욱 까끌까끌한 질감의, 리스너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한 텍스트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러 텍스트 사이를 종횡무진 하는 그것은, 일종의 '놀이'였다. 당시까지도 3호선 버터플라이는 '통합'보다는 '분리', '조화'보다는 '모순'을 더욱 사랑했다.

<식민지>가 [Oh! Silence]를 표상한다면 [Nine Days Or A Million]에서 상징적인 트랙은 <깊은 밤 안개 속>이다. 이례적으로 피아노를 포함한 고전적인 록 세션으로 연주되는 <깊은 밤 안개 속>에서 3호선 버터플라이는 "깊은 밤 안개 속 사랑"이 "사라지면 안 돼"라고 노래한다. [Oh! Silence]에서 네거티브하게 입장을 '정하지 못한 것'이나 [Time Table]에서 포지티브하게 입장을 '정하지 않은 것'과는 다르게, <깊은 밤 안개 속>에서 3호선 버터플라이는 '무엇인가 사라지면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쪽에 선다. 그 무엇이 사랑이건, 진리이건, 무엇이건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그것이 어느 것이든 '입장을 정했다'라는 사실, 어느 쪽이든 자리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Nine Days Or A Million]에서 그들은 절대 이목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각각의 트랙마다 노림수가 명확하다. 그러한 까닭에 강조되는 것은 레이어 간의 이질성이 아닌 동질성이다. 레이어 사이의 거리가 없기에 그 사이를 넘나드는 놀이 역시 없다. 대신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감정'이다. [Nine Days Or A Million]의 수록곡들은 자꾸만 스스로 하나의 감정으로 되려한다. 감정의 흐름을 교란시키는 모순과 역설도 없기에, 리스너는 자연스레 그들에게 밀착된다. '입장 없는 입장'이 우리를 계속 입장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역할로 몰았다면 '어느 쪽에라도 선 입장'은 좌우지간 잠정적으로나마 그다음을 고려할 수 있게 한다. 요컨대 이전까지의 작업이 '정체성'에 관한 작업이었다면 [Nine Days Or A Million]은 그다음을 내다보는 작업이다. 이번 EP가 짤막한 모음임에도 불구, 3호선 버터플라이의 작업들 중 가장 감동스러운 결과물을 담고 있음은 그래서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이전의 작업들은 본질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작업들이었지 '감동'을 지향했던 작업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선택이 늘 좋은 결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Nine Days Or A Million]은 이전의 [Time Table]이 그랬듯, 직관적으로 훌륭하다(그렇기에 이는 이 베테랑 밴드가 세월을 헛보내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작업들도 분명 들을만하겠다는 기대감 또한 보증한다). 훌륭함의 근거를 대라면 지금까지 써내려 온 만큼의 지면이 더 필요하겠으나, 이 글에서의 관심사는 '3호선 버터플라이의 새로운 EP는 왜 훌륭한가?'가 아닌 '3호선 버터플라이의 새로운 EP는 이전의 작업들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이다. 전체를 조망하기보다는 주름진 한 단면을 펼쳐 내보이는 글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내 결론은 '3호선 버터플라이의 새 EP는 마치 오랜 경력의 베테랑들이 헤쳐모여 새로 결성한 슈퍼밴드의 데뷔 EP처럼 들린다'이다. [Nine Days Or A Million]에는 남상아의 목소리가 있고, 성기완의 기타가 있고, 김남윤의 프로그래밍이 있고, 손경호의 드러밍이 있지만 정작 옛 3호선 버터플라이의 핵심(核心)은 부재하다. 대신 그를 대체하는 새로운 핵심들이 존재하고 있다. 덕분에 3호선 버터플라이는 <깊은 밤 안개 속> 같은 감동적인 트랙을 얻을 수 있었다. 아마 이전 같은 입장에서라면 불가능한 성취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할 성취를 당시에 달성하기도 했다. 이 둘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과연 이 둘은 필연적으로 상충할 수밖에 없는가? EP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왠지, 여기, 바다>는 괜히, 어떤 실마리를 줄 것만 같은 트랙이다. 물론 쉽게 주는 것은 아니다만 짐작 정도는 해볼 수 있을 테다. 옛 3호선 버터플라이의 핵심이 이번 EP에 '부재'한다고 썼지만, 누구 말마따나 "부재란 하나의 위치와의 관계의 무(無)는 아니다". 부재가 곧바로 무를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이 문장을 잘 새기면서, 다음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이 시점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하나 있기는 하다. 어릴 적의 나처럼 3호선 버터플라이를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닐 어린 친구들이 이제는 3호선 버터플라이의 무엇에 꽂힐 것인가? (단편선/보다)

http://bo-da.net/entry/3호선-버터플라이-Nine-Days-Or-A-Mi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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