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거리는 밤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 아주 사적으로 두리반을 이야기하기 Writing

*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 기고한 글이다. 일요일날 완성한 원고인데, 하루 만에 올라왔다.
* 사적인 내용이 많은 탓에 연관이 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모로, 큰 감정이 없다. 글의 모티브를 얻고 콘텐츠를 채워나가던 때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꼭 같지는 않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협의가 끝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일단은, 당시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때의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인디언밥>에 기고된 버젼에는 사진도 있고, 글씨도 큼직큼직하다. 그리고 문단도 조금 더 많이 분할되어있다. 맞춤법이나 이런 부분에서 다소간의 수정이 있었는데, 편집자의 판단을 존중한다. 단, 내가 직접 운영하는 블로그에는 보다 원문에 가까운 버젼으로 다시 올리는 것이 맞다 판단되어 텍스트 위주로만 글을 올려둔다. <인디언밥>에 기고한 것은 이곳을 참조하라.

거리는 밤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 아주 사적으로, 두리반을 이야기하기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두리반 평상에서 눈을 떴다. 에어컨 없이 여름날을 버티기가 녹록치 않아 창문을 모두 깨트려둔 탓에, 창 바깥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여과 없이 들어 치던 새벽. 이따금 멀리서 거나하게 술취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도 했다. 나는 평상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다, 이내 슬리퍼에 두 발을 밀어 넣었다. 입구에 막아둔 철판은 살짝 옆으로 치우고, 나는 자전거에 올랐다. 익숙한 일이었다. 가족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집으로 향하는 일, 그리고 마치 새벽에 들어온 것처럼 곤히 잠드는 일. 술에 취한 청춘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새벽의 홍대 앞을 지나는 것이란, 왠지 설레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이미 깨어계셨다. 하지만 그랬거나 저랬거나, 아직 아버지가 일어나시지 않았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며칠 전에도 아버지는 “매일 다른 곳에서 잠잘 거면 집에서 나가”라 말씀하셨다. 아버지로서는, 심지어 나로서도 당연한 말이었다. 일주일 가까이 집에서 하루도 잠자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주로 농성장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능력한 나로서는 당장 집에서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그래서 이번 연말 정도에는 집에서 나가는 것으로 협의를 보았다. 나는 방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혼자 유지할 수 있는 성인으로서의 역량을 인정해준 것이라 보는 편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감정이 매끄럽지 않았을 뿐이다, 라고 혼자 생각했다. 아버지가 깨어나기 전에 나는 얼른 이불을 덮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러다 이내 아버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나 나는 계속 잠자는 척을 했다. 잠자는 척이라기보다는 죽은 척에 가까웠다. 어찌되었건 요새 같이 흉흉한 때, 얼굴 마주치면 무슨 얘기를 들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침 밥상이 왠지 시끄럽더니, 이내 아버지가 달려와 잠자는 척 하고 있던 내 이불을 걷어내더니 자리에 앉으라 하셨다. 나는 군말 없이 앉았다. 아버지는 화가 나 있었다. 할머니가 내 졸업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셨나 보다. 원래 이번 학기가 졸업 학기였던 나는 여러 이유로 졸업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수 학점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작년 초에 군대를 다녀와 몇 개월 동안 성실한 척 공부를 하던 나는 이내 병이 도져 다시 학교 밖으로 나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도 학교 수업은 나갔었는데, 이번 학기에는 중간고사가 끝난 뒤로는 거의 학교를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바쁜 일은 있었다. 메이데이 때 약칭 <51+>라 불리던, 60팀이 넘는 음악가들이 출연하는 큰 공연을 준비하느라 4월 초부터는 눈코 뜰 새가 없었고, <51+>가 끝난 이후에는 행사의 뒷정리를 하느라, 그리고 5월 중순을 넘어서는 진보신당의 선거운동을 돕느라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탓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싫었다. 그전부터도 친구들과 “학교 다니기 진짜 귀찮다”라 떼로 푸념한 적은 많았지만 그때가 단순한 투정이었다면, 지금은 전반적인 회의(懷疑)였다. 아마 한받 씨의 『탐욕소년 표류기』를 읽은 것이 화근이었을 지도 모른다. 김예슬이라는 친구가 ‘선언’을 발표하고 당돌하게 대학 문을 박차고 나갔던 것이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시집이나 소설집을 너무 많이 읽어서,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혹은 두리반에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 없는) 청소년 활동가들을 알게 되었거나, 아나키스트인 조약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이렇게 학교를 다니는 것에 회의를 느낀 적이 없었다.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되어, 졸업을 목전을 둔, 심지어 그렇게 후배들에게 ‘대학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보다는 강요)를 하던 주제에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나는 왜 대학에 다니고 있을까?” 문득 막막해졌다. 나는 학점을 잘 따야 하는가? 나는 좋은 음악가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토익 성적이 필요한가? 나는 좋은 음악가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취직을 하고 싶은가? 나는 좋은 음악가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눈앞으론 클리세한 다툼 광경이 펼쳐졌다. 숟가락이 날아가고, 밥알이 튀기고, 조금은 밥상을 때리기도 하고, 뭐 그런 것들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벌게진 얼굴로 “집에서 당장 나가라”며 소리를 쳤고 할머니는 “이번 학기에 꼭 졸업해야 한다.”라며 손을 꼭 잡으셨다. 그러나 그것이 괜한 일이라는 것은 아버지나 할머니, 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파국, 이런 것들 말이다. 음악가로 살아가겠다 결심했던 그 순간부터, 다만 유예되고 있었고, 지금은 그 유예기간이 끝났을 뿐. 어차피 겪어야 할 과정이었다, 라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평온한 마음이었다. 마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따금 눈물이 흐르기도 했으나, 그것에는 화, 분노, 격정, 그 어느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그것이었다.

특히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실제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는 음악가들이 많지 않은지라 지라 군에 다녀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꽤나 많은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었다. 아마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하는 젊은 친구라는 판단에서였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번번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나만큼이나 수동적으로 살아온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음악을 하겠다 다짐했던 것은 아마 공부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그러고도 대학에 들어갔던 것은 가족들이 대학은 가야한다 말했기 때문이었지? 대학 다니며 수업을 들어가지 않고 낮은 학점을 줄곧 유지하면서도 나는 음악가니까, 라고 생각했었지? 장학금 15만원을 준다는 꾐에 넘어가 학생회를 하기도 했었지? 국가에서 부르니까 아무 생각 없이 군대에 갔었지? 군대에서 만난 친구가 용산 참사 현장에 스쿼팅을 하자고 했을 때, 재미있겠다고만 생각했지? (우리는 스쿼팅을 시도하다 1시간 만에 경찰에게 연행된 적이 있었다. 전역하고 불과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알량한 정의감을 채우는 동시에 술도 먹고, 여자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이런저런 활동들을 하게 되었지? 그래서 결국 당도한 곳이 여기, 두리반 아닌가? 무능의 종착지가 아닌가? 어느 순간, 나는 변명하기를 그쳤다. 다만 주어진 환경에서 더욱 ‘재미있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삶을, 나의 욕정으로 가득 찬, 비루먹은 삶을 직시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생각했다. 그래, 나는 (객관적으로) 쓰레기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은 유일한 길이었다.

아버지가 출근을 하시고, 점심에는 큰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큰아버지의 전화가 끊기자, 또 할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대학을 졸업하라는 것. 아주 악취미적으로, 나는 괜한 반감이나 들곤 했다. 상대적으로 유한 할머니에게는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가족 사이에 은연중에 통용되던 어떤 룰, 그 룰을 먼저 깬 것은 나였다. 오히려 우리 가족처럼 리버럴한 가족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늘 내게 관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386이고, 합리적이며, 물론 가끔 다혈질이긴 했지만, 심지어 얼마 전에는 모 진보정당에 투표할 정도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좋아하거나, 존경했다. 결국 선은 넘은 것은 나였다. 아버지가 “어차피 역사는 더욱 나은 쪽으로 흐르고 있으니, 네가 한 몸 건사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의 일을 도울 이유가 없다”라 말했을 때,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었다기보다는, 그 이상을 내가 이야기하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예의였다.

해가 질 무렵, 그럼에도 나는 다시 두리반으로 출발했다. 그날은 토요자립음악회가 있던 날이었다. 타운홀 레코드의 코어 밴드들과 불길한 저음의 공연이 준비되어있었다. 3층의 스테이지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땀 냄새로, 혼곤할 지경이었다. 두리반의 상황은 늘 그렇듯, 좋지도 좋지 않지도 않았다. 공연을 이어간다고 해서 두리반의 재협상이 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 점이 늘 괴로웠다. 다만 투쟁기금함에 자율기부제로 모인 몇 장의 지폐만이 위안이었다. 아, 그럼에도 아주 조금씩은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두리반이든, 나든 결국은 버텨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포크레인이 한번 때리면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이 낡은 건물이나, 내 처지나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생각이 그즈음에 미쳤을 때, 눈 앞에서는 불길한 저음이 세팅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동지(同志)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된 박다함이나 권용만, 왠지 맑스를 담아 귀여우신 홍철기 씨 등이 악기들을 너저분하게 배열하기 시작했다. 장여사 님의 스크리밍에 이어 무정형의 노이즈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거대한 노이즈의 바다에 홀로 부표하는 듯, 나는 온몸으로 노이즈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평온한 기분이었다. 문득 루쉰의 경구가 떠올랐다. “희망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다. 본래 땅 위에 길은 없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거리는 밤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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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0/07/06 03:4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단편선 2010/07/09 12:36 #

    동지는 간데 없고 -_-ㅋㅋㅋㅋㅋㅋㅋㅋ 바디우는 왠지 마초 좌빨 냄새가 나서 좋아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교조주의 짱
  • 프리스티 2010/07/06 10:48 # 답글

    전 뭐 대학은 평생 있을 곳이라 생각하니까 별 충돌이 없긴 한데, 교회가 문제...........
  • 단편선 2010/07/09 12:36 #

    !!!?? 그게 더 시러 ㅜㅜㅜㅜ
  • 베리블루스 2010/10/11 11:21 # 답글

    역사가 더 나은 쪽으로 흐르기는 하는 걸까요?
    심지어 개인의 역사는 과거로의 회귀만이... 퐌타지일뿐..
    아놕.. 왠지 부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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