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의 조건 : 두리반의 경우> 발제 개요(광주프린지페스티벌 '플러그 토크쇼 : 자립의 음악, 음악의 자립' 발제용) Writing

금일 광주프린지페스티벌에서 발표할 발제 개요를 올려둡니다. 의도치 않게 하루 만에 급히 작성을 해야해서 엄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논의해야할 부분들이 많은데, 사실 너무 발제를 길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찌되었건 제 입장에서는 두리반에 대해 최초로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글이 되겠네요. 보시면 알겠지만 적극적으로 정세에 개입을 하거나, 의견을 개진하는 글이 아니라 '보고서'에 가까운 글일 듯 합니다. (실은 의견을 마지막 epilogue 부분에 제시할 생각이지만 보시다시피 본문에서는 뺐습니다).

'자립팜플릿 2'라는 팜플릿에 들어가지만 실제로는 개인이 쓴 글이라, 공식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봐주시면 좋겠습니다(왜냐하면 저는 그 조직에서는 너무 좌빨 크리라서 -_-) 

 

[발제 2]


자립의 조건 : 두리반의 경우


발제 : 단편선(자립음악가, 비평가, 회기동 단편선 활동 중)

blog : danpyunsun.egloos.com

twitter : @danpyunsun


prologue


자립음악생산자모임(가)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 계기로서의 ‘두리반’

→ ‘두리반’이란? :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삼거리에 위치한 칼국수집

: ‘홍대앞’ 기준으로 가장 변방에 위치

: 2005년, 안종려 사장 내외가 몇 년 동안 24시간 찜질방 매점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낸 아담한 가게

→ 2006년, 두리반 터가 공항철도 공사로 인하여 마포구청으로부터 ‘지구단위계획 지역’으로 지정

(일반 재개발과 지구단위계획의 차이? : 일반 재개발은 관에서 직접 개발하는 반면, 지구단위계획은 그보다 작은 단위에서의 민간개발사업. 일반 재개발과는 다르게 지구단위계획에서는 ‘세입자’에 대한 보상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음)

→ 2009년 12월 24일, 철거용역들의 침탈, 그리고 26일 철판을 뜯고 들어와 농성을 시작, 현재 300일에 다다르고 있는 철거농성


2) 자립음악회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 자립음악생산자모임(가)은 6월 경 본격적으로 논의 시작, 자립음악회는 2월 말부터 시작

→ 2010년 2월, 두리반에 대한 소식을 신문에서 접한 음악가 정동민과 한받이 두리반을 방문, 농성 주체들의 사정을 들은 뒤 음악회를 열면 어떻겠느냐? 제안

→ 그 후 매주 토요일마다 <자립음악회 : 사막의 우물, 두리반(이하 자립음악회)> 진행 중


3) <자립음악회>는 어떻게 진행되고있는가?

→ 현재 27회째 진행 중

→ 초기의 <자립음악회>에서는 주로 두리반에 연대하는 시민들이 관객으로 참여, 1회 공연당 평균 순수 관객수는 10명 안팎

→ 그러나 5월 1일, 두리반에서 열린 <세계노동절120주년맞이뉴타운컬쳐제공재개발파티 51+(이하 51+)> 이후 양적, 질적인 변환(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서술)

→ 5월 1일 이후 현재 음악매니아, 두리반에 연대하는 시민 양자 구분없이 관객층으로 참여, 1회 공연당 관객 수는 20~100명 가량, 평균 30~40명 선 유지


(<자립음악회>에 대한) 앞선 맥락들


1) 홍대앞의 정치경제지형 변화

→ 2000년대 중반 이후 도심 재개발의 가속화 : 대대적인 마포구 재개발 플랜이 발표,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대형건물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 또한 홍대앞을 문화지구로 지정하면서 오히려 ‘걷고 싶은 거리’를 중심으로 유흥가가 발달, 결과적으로 자본이 밀집하는 공간으로 탈바꿈

: 이런 와중 영세한 규모의 클럽, 그리고 독립공간들이 높아지는 월세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속출

: 공간들 뿐만 아니라 홍대앞에 밀집되어 있던 음악(혹은 문화)생산자들의 주거 및 작업실들 역시 인근의 합정동, 상수동, 망원동, 성산동으로 밀려나는 상황

→ 홍대앞 독립공간들의 자본화 : 높아지는 월세부담 등으로 더 이상 소규모 클럽으로는 버틸 수가 없어진 상황

: 따라서 영세클럽을 운영하던 (이들 중 여유가 있던) 일부는 기존의 소규모 클럽을 그만두고 보다 규모가 큰 중규모 공연장을 새로 운영하게 됨, 또한 새로 만들어지는 독립공간도 소규모 클럽보다는 중규모 이상의 공연장이 주를 이루게 됨

: 기존의 공연장으로 치면 ‘소극장’에 대응될 수 있는 중규모 공연장은 수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밴드 및 음악가를 공연에 세워야하므로 공연 공간을 될 수 있지만 ‘인큐베이팅’을 위한 공간을 될 수 없음

→ ‘상품을 위한 상품’이 되어가는 ‘인디’ : 1990년대 후반 IMF라는 사회적 상황에서 잠시 ‘인디’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오갔던 시기가 있었으나 실제 현실적인 인프라와 (비교적 거대했던) 담론 사이의 간극이 쉽게 노출되었으며, 곧이어 거품도 꺼지면서 소위 ‘인디 1세대’라 통칭되는 몇몇 메이져 밴드(이를테면 크라잉넛, 노브레인,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등) 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명칭 그대로 ‘언더그라운드’화 됨

: 2000년대 중반 무렵, 한국에서는 10, 20대를 중심으로 싸이월드, 네이버 블로그 등 사회 관계망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가 크게 유행하면서 (주로 BGM 시장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음원 시장이 큰 폭으로 상승

: 그에 발맞추어, 인디씬에서는 소위 ‘인디가요’라고 불리는 일군의 (주로 라운지한 취향의) 음악들이 대거 생산되는 현상이 발생

: 특히 2008년, 2009년 장기하 현상과 함께 인디씬으로서도 (인지도 면에서) 어느 정도 동반상승하는 효과가 있었음을 모두 부인할 수는 없음

: 또한 이 시기를 전후로 네이버(오늘의 뮤직), MBC(라라라), KBS(이하나의 페퍼민트), EBS(스페이스 공감 및 헬로 루키) 등 대형매체들이 상품성 있는 인디음악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현상

→ 자본과 인디의 조우가 낳은 결과들 : (이에 대해서는 명암이 있을 테지만 주로 어두운 쪽을 들춰보려함)

: 적절한 시기에 중규모 공연장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던(그러한 자금동원력을 가질 수 없었던) 대다수의 소규모 클럽들은 어려운 상황에 놓이거나 문을 닫게 됨

: 특히 주로 펑크/하드코어 공연을 기획하다 2009년 1월 3일 마지막 공연을 하고 문을 닫게 된 ‘스컹크헬’의 경우는 꼭 주목해야할 사례, 결과적으로 펑크/하드코어 씬의 재생산이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으로 발전

: 근래에도 실험적인 아티스트들이 공연하던 클럽 겸 바 ‘무대륙’, 그리고 ‘BOWIE’가 문을 닫게 됨

: ‘제 2의 부흥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디씬으로 유통되는 자본은 점차 늘어나고 있고, 관객층도 비교적 늘어나고 있는 편이나 실제로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음악생태계’에서 ‘다양성’은 크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태

: 한편으로 ‘인디’는 사회적 맥락에서 일종의 ‘상징자본’으로서 기능하게 되면서 ‘씨엔블루가 인디 출신’이라든지, ‘(슈퍼스타 K의) 장재인이 인디 출신’ 같은 식으로  일종의 어드밴티지 및 자본으로 활용되는 것 이외에는 의미를 찾아볼 수 없어지는 추세

→ 이를 종합할 때, 결과적으로 ‘자본의 흐름’ 혹은 ‘정치경제지형의 변화’라는 문제가 ‘음악생태계’에 직간접적으로 분명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2) (주로 음악생산자 입장에서의) 이러한 추세에 반하는 흐름들

→ 한받, 박다함, 홍철기 등이 네벌련(네버라잇+벌른앤니들+연합전선)을 결성하여 ‘홍대와 인디라는 실체없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라는 입론에 입각한 마니페스토를 발표하고 거리에서 시위, 아래는 당시 외친 구호들↓(2008)


음악가는 ‘홍대’와 '인디‘에 종속되지 말자.

클럽과 레이블 운영자는

기존의 구태의연한 공연, 제작 시스템을 개혁하자.

수용자는 ‘인디’에 대한 소비를 중단하자.

평론가는 ‘인디’에 대해 떠들기를 중단하자.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고, 다만 즐겁지 않을 뿐이다.

(한받 [탐욕소년 표류기]에서 발췌)


→ 박준흠, 한받, 류한길 토론회 <인디즈는 이름의 유령을 만나라>에서 ‘비평가’와 ‘음악생산자’의 입장이 서로 맞부딪힘(2009)

→ 한받의 제안으로 뜻 있는 몇몇이 십인회를 조직. 음악가 10명이 각각 100만 원씩 내서 마련한 자본금 1,000만 원으로 공간을 얻고 그 공간을 합주연습실, 녹음실, 라이브클럽 등으로 운영해보려 했지만 논의가 지속되지를 못함(2009)

→ 그간 진취적인 음악가/예술가들의 장(field)으로서 기능했지만,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2009년 말 폐쇄가 확정된 홍대앞의 ‘서교지하보도’에서 상상공장, 서교동주민자치회, 음악가들의 주최로 <묻지마! 파티> 개최, 아래는 당시 아티스트를 모집하던 홍보문↓ (2009)


홍대앞 유일의 민원 없는 야외 공연 장소 "서교지하보도" 가 매립될 위기에 처해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지역주민과 아티스트의 서교지하보도 매립 반대의 의견을 전하는 문화행사를 릴레이 형식으로 열고자 합니다. 민원으로 인해 야외공연도 쉽지 않은 홍대앞 아티스트들에게 있어 서교지하보도는 마음껏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화적 장벽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은 선뜻 들어서지 못하는 갤러리 및 여러 문화공간들에 반해, 서교지하보도에서는 시민들이 아티스트와  그 어느곳보다 가깝게 호흡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따뜻한 공간 서교지하보도의 존립을 바라는 아티스트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는 바입니다.


→ 서교지하보도에서 <진식이의 1020> 등의 공연을 함께 기획했던 한받과 정동민이 두리반의 소식을 듣고서는 두리반에 찾아가 단편선 등과 토요일마다 자립음악회를 기획하기 시작(2010)

<51+>의 성과


1) <51+>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 2010년 2월부터 두리반에서 자립음악회를 기획하던 한받, 정동민, 단편선이 먼저 3월 말 발의하여 (금요일마다) 칼국수 음악회를 기획하던 조약골과 두리반 건물 3층에서 아방가르드한 미술 작업을 하던 미술가 유병서(와 미완성포럼), 그리고 이전부터 한받과 ‘네벌련’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한 노이즈 음악가이자 공연기획자인 박다함이 모여 ‘그룹51’이라는 임시조직을 만들고 준비를 시작

→ 음악가도 노동자인데, 5월 1일 120주년 메이데이를 맞아 51개의 밴드, 음악가들을 모아 두리반 자립음악회가 있는 날 공연을 해보자는 한받, 단편선의 소박한 아이디어가 4월 초, 직접 밴드 섭외를 들어가면서(의외로 밴드들로부터 호응이 좋아) 급물살을 타면서 대규모 프로젝트로 전환


2) <51+>!

→ 4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함께 하고 싶다”는 밴드들의 수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51밴드를 넘어 63밴드까지 불어남. 결국 그 이상 공연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아래 이후 접촉하는 밴드들에게 “죄송하지만 다음에 연락 드리겠습니다”라 말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

→ 역시 4월 중순 이후 매체 보도가 급물살을 타면서 헤비 리스너 및 진보/좌파적인 시민(주로 20대, 30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결국 예매 폭주로 홈페이지가 매일 다운되는 지경으로

→ 5월 1일 12시, 두리반 뒷공터에서 성공회대 사회대학 풍물패의 여는 마당, 그리고 유채림의 발언으로 시작하여 총 63개의 밴드가 두리반 뒷공터, 두리반 건물 지하 1층, 지상 3층, 이렇게 3개 스테이지를 활용하여 다음날 새벽 3시 경까지 연주

→ 500명 이상만 오면 성공이라는 예상을 깨고 추산 2,500명 가량이 몰림, 스테이지였던 두리반 건물에는 이미 이른 오후부터 사람이 꽉 차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황까지, 그러나 큰 안전사고 없이 무사히 종료


3) <51+>의 공과

→ 두리반 철거농성史는 물론 자립음악생산자모임(가)의 구성원들에 있어서 가장 폭발적인 전환점

→ 두리반과 연대하는 이들의 변화

: <51+> 이전에는 주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 한국작가회의 등 기존의 정당, 종교계, 운동조직에서 주로 연대, 연령대로도 30~50대가 다수를 차지

: <51+>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면서 청소년 인권 네트워크, 아스나로 등에서 활동하는 10대 활동가들이 대거 두리반으로 유입, 이들 중 많은 수가 두리반을 다시 찾고 또 일부는 두리반에서 직접 상근자로 활동을 하게 됨

: 또한 청년유니온, 마포FM <이빨을 드러낸 20대> 등 전반적으로 10대, 20대 활동가들이 종종 찾게 되면서 연대하는 구성원들의 연령이 현격하게 낮아짐, 현재로서는 10~20대가 두리반 농성에 연대하는 이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실정

: 이에 더하여 <51+> 이후로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건 ‘게스츠 하우스’의 성격까지 일부 띠게되면서 속칭 ‘잉여’라 부를 수 있는,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않은 프리터(혹은 프리카리아트)들이 두리반으로 모여들게 됨

: 그러나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면서 자연스레 두리반 내에서도 친밀도, 혹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소간 경계가 형성되는 측면이 있었으며 이후 이런저런 상황과 사안들이 있었을 때 구성원들 간의 이견이 갈리는 경우가 잦았음

: 또한 <51+> 이전에 연대하던 조직들에서 여러 이유로(주로 지방선거 국면을 전후하여) 이전에 비하여 긴밀한 연대를 주고받지 못하고 있는 경향들이 포착

: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두리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이들의 풀(pool) 자체가 커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음

→ 두리반 운영에서의 변화

: <51+> 이후로 두리반 내에서의 기획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많아졌고, 이에 더욱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서 동시에 친목을 다지는 목적으로 2주에 한번씩 일요일에 ‘두리반 반상회’를 개최하게 됨

: 하지만 정확한 룰도 운영체계도 없는 회의였기에 논의는 종종 민주주의적인 절차에 따라 운영되지 못하였고 또한 집행사항에 대한 구속력이 없는 까닭에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음

: 오히려 친목 목적으로서는 좋은 기능을 발휘하였는데, 주로 구성원들 간의 미스-커뮤니케이션으로 인한 감정적인 앙금들을 푸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 측면이 있음

→ 매체력의 변화

: <51+>를 계기로 언론매체들의 관심이 크게 증대되게 됨, 진보매체들을 중심으로 고정적으로 두리반에 대해서 보도하는 기자층이 형성

: <51+> 이전에는 ‘사회부’에서 주로 두리반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51+> 이후에는 ‘문화부’에서도 가세,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그리고 다양한 루트의 보도가 나갈 수 있는 상황으로 전환

→ 지역사회 내에서의 위상변화

: ‘서울시 마포구’라는 지역에서의 주요한 분쟁 지역으로 지역 사회 내에서 포지셔닝에 성공, 지방선거 당시에 민주당 마포구청장 후보도 방문할 정도로 위상 높아짐

: ‘성미산 마을 공동체’와 함께 마포구 내에서의 진보적 (농성) 공동체로 자리매김

→ 전체 (철거운동을 포함한)운동 지형 내에서의 위상변화

: 이른바 ‘용산참사’ 이후 사회적으로 재개발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진 가운데,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농성으로 2010년 현재 시점에서 ‘철거 농성’의 아이콘 격인 지위를 획득

: 그러나 그것이 꼭 좋은 결과를 낳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를테면 두리반 안종려 사장이 가입하여 있는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농성의 방향을 결정하고 전략을 짜는 과정에서 배제됨으로서 상대적으로 역할이 떨어진 측면이 존재

: 역시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대안적인 진보운동, 혹은 대안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일부 띠게 된 측면이 존재함

→ 자립음악생산자모임(가)의 직접적인 결성 및 대중에게 알려지는 계기로서 기능

: <51+>를 준비했던 음악가/예술가들 중 대다수가 자립음악생산자모임(가) 결성에 참여하게 됨

: 두리반의 경우에서와 동일하게 자립음악생산자모임(가) 역시 매체력, 지역사회 내에서의 위상, 전체 운동 지형 내에서의 위상이라는 측면에서 이점을 가지게 됨

: 결정적인 이점으로서 <51+>라는 큰, 그리고 실험적인 행사를 치룬 까닭에 (대다수는 아니더라도 일정 정도의) 음악가들에게 인지도 및 신뢰도를 가지게 됨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자립음악회>


1) 두리반 입장에서의 정치적 의미

→ (앞서 지적했듯) 표면적으로는 ‘매체력 확보’가 가장 큰 성과

→ 그에 덧붙여, 대안(문화)공간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자율적인 시민 참여’가 두드러지게 되는 현상

: 이를테면 7월 중 진행했던 ‘두리반에게 촛불을’ 캠페인이나 근래의 ‘두리반 후원 주점’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두리반을 후원했음

: 또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율적인 시민들’이 사실상 10~20대 프리터/프리카리아트 계급으로 분류될 수 있는 케이스가 대다수라는 것인데, 당장에 자본력 등 물적인 동원력은 부족하나 (전 세대에 비하여) 비교적 넓은 문화적 스펙트럼이나 (역시 전 세대에 비하여) 사회 연결망 서비스에 대한 활용도가 높다는 등의 이유로 (당장은 현실화 되지 않지만) 잠재적인 역량이 늘어가는 효과, 결과적으로 이러한 잠재력으로 인하여 캠페인, 후원 주점 등의 이벤트가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음

→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두리반 농성을 이끌어가는데 필요한 직접적인 물적 기반, 이를테면 ‘화폐’ 등을 <자립음악회>에서의 후원으로 조성하는 측면이 실은 굉장히 중요함

→ 지속적인 문화행사에 농성의 기반을 두었기에 농성 주체들이 쉽게 지치지 않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는 효과

: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소 엄격한 판단이 필요한데, 기반이 문화행사 쪽으로 이동하면서 상대적으로 실질적인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적 결합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어, 향후 이 방향에 대한 보강이 필요

: but 7월 중 진행했던 ‘마포구청 도시계획과 점거 농성’의 경우에 ‘자율적인 시민들’이 직접 ‘물리력’ 행사에 크고 작은 도움을 준 경우도 적지 않았기에, ‘문화적 실천’이 ‘정치적 실천’과 어느 정도는 맞닿고 있음을 부정할 이유는 없음


2) (자립)음악생산자로서의 정치적 의미

→ 개발독재 자본주의의 ‘증상’으로서 2010년 서울에서 발생한 ‘두리반 농성’에 같은 지역에서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음악생산자들이 직접 참여함으로서 우리들이 오래간 거주하며 일구어놓은 ‘홍대앞’이라는 토양이 자본에 침탈당하는 것을 막아냄

: 그 결과로서 자본이 침공을 막아내거나, 최소한 약화/완화시켜 홍대앞의 (다양한 음악들을 상연하는) 공간들이 지속될 수 있게 만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음

: 그로 인하여 홍대앞 ‘음악생태계’의 ‘다양성’을 지킬 수 있음을 또한 기대

→ 자립음악가로서 필요한 공정(믹싱, 자체공연기획, 홍보 등)을 익히는 수련의 장으로서도 의미있음

→ 하나의 사회적 단위로서의 ‘음악가’ 혹은 정치적 단위로서의 ‘음악가’의 ‘시민권’을 선포하는 운동적 측면

: (여타의 직업군과 마찬가지로) 음악가 역시 일정한 노동을 바탕으로 사회에 비물질적 생산물(개인적으로는 ‘감정/감성’이라는 용어로 표현)을 생산하여 기여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회적 존재’임을 스스로 인식하는 동시에 알려나감

: ‘사회적 존재’임을 주장하는 것은 곧 ‘시민권’에 대한 권리투쟁에 돌입한다는 것으로 이를테면 다른 직능 단위에서 4대 보험 등, 사회적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권리가 ‘음악가’라는 직업군에도 가능함을 역설

: 이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운동’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인데, 그 이유는 (사회적인 발언권의 측면에서) ‘몫 없는 자들’이 ‘몫’을 가지려하는 행위를 이미 ‘몫을 가진 자들’이 쉽게 인정할 리가 없기 때문

→ 대부분의 음악생산자들이 한국적 상황에서 (앞 세대로부터 많은 자본을 이전받지 않았다는 조건 하에) 빈곤 상태를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몫 없는 자들’이라는 부정적인 규정을 통하여 되려 계급적인 보편성을 획득하며, 동일한 계급끼리 연대하는 것이 필요

→ 하지만 실질적으로 <자립음악회>에서는 ‘연대’에 의미를 더욱 두고 있지, 아직 음악가 자신들의 처지(혹은 계급적 조건)를 본격적으로 공론화시키고 있지는 못한 상황, 향후 이에 대한 보강이 필요함


‘미적 실천’으로서의 <자립음악회>


1) 소수성(minority)에 대한 개방으로서의 <자립음악회>

→ 홍대앞 로컬 씬에는 양적/질적으로 소수인 음악들이 존재

: 현재 트렌드를 이루고 있는 소위 ‘라운지’한 팝 그룹들, 그리고 스탠다드한 팝록 그룹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은 실제로 소수적인 차원에 놓여있음

: 이를테면 노이즈 뮤직, 펑크, 하드코어, 레게, 일렉트로니카, 인스트루먼틀 록, 즉흥음악 등의 장르는 특히 대부분의 소규모 클럽에서 환영하지 않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

: <자립음악회>는 이러한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한국적인 맥락에서의) 새로운 사운드를 발굴하고 음악회 무대에 올림으로서 ‘미적 실천’이라는 측면을 중시

: 이는 기본적으로 두리반이라는 공간이 ‘화폐재생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공간이기에 가능

→ 이를 바탕으로 다수성/소수성이라는 허구적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음


2) 공간에 대한 ‘전유’로서의 <자립음악회>

→ 두리반에 대한 정치적인 열광을 미적인 열광으로 전유하거나, 최소한 구분없이 만듬으로서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미적 체험을 가능케 함

→ ‘농성 공간’을 ‘문화 공간’으로 전유하는 그 자체로 이미 미적인 전회, 두리반이라는 공간에 전혀 다른 맥락을 매개

→ 아나키스트들의 스쿼팅과도 맞닿는 맥락

→ ‘농성 공간’ 특유의 미니멀한 ‘질감’에 대한 적극적인 사용권 확보


그 한계들


1) ‘정치적 실천’과 ‘미적 실천’이 대립하는 경우

→ 미적 실천이 곧바로 정치적 실천으로 전회될 수 있는 것은 아님

: 통상적인 경우에서 미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은 거의 분리되어있다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함

: 최근에도 (근래 가장 글로벌한 트렌드를 잘 반영하는 기획을 하고 있는 그룹인) Super☆Color☆Super에서 두리반 쪽에 오퍼가 왔을 때 (대다수의 관객이 외국인일 것이라는 예상에) ‘외국인’에 대한 공포 등의 요인으로 인하여 두리반 내에서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하여 논란이 되었던 경우가 있음

: 당시 나(단편선)는 두리반 농성이 지금까지의 두리반 농성이 가지고 있던 잠재적인 역량들은 두리반 내 정치적/문화적 스펙트럼의 ‘다양성’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볼 수 있는데 그렇기에 새로운 기획자들에 대하여 최대한 배려해주어 ‘미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 실천’과도 직결될 것이라 주장(그러나 현실적으로 꼭 그렇지는 않음을 스스로는 인식하고 있음)

→ 실제로 ‘미적 실천’의 측면에서는 아주 뛰어난 기획이더라도 관객들이 많지 않아 두리반의 ‘정치적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데에는 큰 효과가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


2) 조직되지 않은 ‘자율적인 시민 참여’의 한계

→ 기성운동조직에 속하지 않아 시민들의 참여가 더욱 역동적인 측면이 있으나 결정적으로 ‘물리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시점에는 그러한 역동성이 어느 정도나 발휘될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인 상황


3) ‘장기화 되지 않아야 한다’라는 관념에 대하여

→ 현실적으로 장기화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장기화 되지 않아야 한다’라는 관념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음

→ 그런 이유로 장기적인 프로젝트들에 대해서는 기획되는 바가 없으며. 짧은 호흡의 기획들만이 가능함

→ 보다 넓은 시야에서의 기획이 필요한 시점


Epilogue


우리의 자립은 어떻게 달성될 것인가? 그와 관련하여, 우리의 연대는 어떠해야하는가?


덧글

  • 양승훈 2010/10/16 11:55 # 삭제 답글

    잘 읽었어요. 언제 이야기할 꺼리가 좀 생기는 느낌이네요. 그 동안 곁다리로만 듣다가 정리된 이야기를 읽으니 감이 팍 옵니다.
  • 처절한기타맨 2010/10/19 11:34 # 삭제 답글

    정리 보고 형태군, 두리반의 정치 문화적 어떤 맹점이 존재 할것도 같은뎅...농성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긴 하는데, 그리 되지는 않을거 같지만, 원하는데로 그렇게 된다 가장하면 안종려 사장님과 유채림 소설가는 안정된 삶으로 복귀한다 할지라도...농성에 결합했던 많은 정치적 문화적 지향이 달랐던 가난한 아트들, 풍각쟁이,노래쟁이,영화쟁이들 놀이터가 사라지는 셈인디...물론 또 현장이 생기면 달려가서 점유를 하건 하겠지. 그 점유하고 노는 재미에 치우친 측면에 대한 이야기라능. 하긴 워낙 농성현장이란게 한줄 언론에 글 나오게 하기 위해서 별 난리를 치는 형편이긴하니, 지금도 기륭은 포크레인점거에 단식,동희오토 현대기아본사앞 난장노숙,재능교육지회의 풍찬노숙,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산은앞 상경투쟁 다들 난리인판에...두리반은 다른 대안이건 다른 투쟁에 대한 한 지점을 열어보이긴한데 다만 놀터를 넘어서는 무엇있지를 찾기가 아직 뜬구름 잡기라능...따로 국밥들 뜨뜻하긴한데 자기 속풀기에 바쁘니들...여튼 긴 글 잘 읽었소이닷!
  • 단편선 2010/11/01 11:50 #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놀터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공동체적인, 자율적인 규율 등이 강조되어야 할 듯한데 실제로 그것을 강요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서요. 나중에 시간을 잡고 이야기를 해보지요 :)
  • 김윤중 2010/10/25 20:15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단편선씨 저번에 두리반에서 보았던 경희대 외국어 대학 집행부 김윤중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두리반 문제가 단순히 철거농성 자체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립음악생산자 분들과도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군요. 두리반과 자립음악생산자분들 모두의 투쟁이 승리할 수 있도록 건투를 빕니다.
  • 단편선 2010/11/01 11:49 #

    투쟁으로 승리하겠습니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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