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보다] 윤영배 인터뷰 - 없으면 그냥 이대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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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윌리엄에는 간판 없는 이발소가 있다. 그곳 이발사는 오랜 세월 한결같이 서로가 서로를 아는 그 동네에서 머리를 깎고 빈둥거리고 산책을 한다. 작가이자 농부였던 웬델 베리의 소설 속 이야기다. 소설 속 이발사를 닮은 또 다른 이발사…. 기타를 든 이발사는 윤영배이다. 무려 17년 전 유재하 음악가요제에서 이한철과 한 팀으로 참가하여 수상한 윤영배는 은자들이 가득한 하나뮤직이라는 공동체에 스며들어, 장필순, 이규호, 불독맨션 등에 작사/작곡한 곡을 발표하며, 장필순 음악 세계의 한 축을 당당히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기타 한 대 소박한 연주로 다섯 곡을 노래, 소박한 EP에 담아 조용히 세상에 내놓았다. 짧지 않은 시간을 돌아 담겨진 노래들에서 도무지 뻔하지 않은, 지극히 삶 그대로를 느끼게 된다면, 이 느리고 한결같은 그의 여행에 동행하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소박하여 아름다운 소리들에, 그 여행을 후회하지 않으리란 기분 좋은 예감도 얻을 것이다. (기린그림/신영선)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동영상이 결정적이었다. 윤영배, 혹은 이발사가 2010년의 마지막 날, 두리반에서 노래한 영상들이 유튜브에 올라와있다. 거기에서 그는 [바람의 소리] 수록곡들과 자신이 예전에 발표했던 <외로운 이층집>과 <길들이지 않은 새> 등을 불렀다. [바람의 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키 큰 나무>는 더 감동적이었다. 사실, 그냥 한 번 인터뷰를 해야 할 텐데, 정도의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키 큰 나무>를 부르는 영상을 보고 난 후 그 자리에서 연락을 했다. 노래하는 모습을 보니 그냥 얘기가 듣고 싶어졌다. 모레 다시 제주도로 내려간다는 얘기에 부랴부랴 약속을 잡고 2시간이 넘게 얘기를 나눴다. 좋은 얘기를 듣고 왔다. 좋은 음악인이었고, 좋은 사람이었다.

일시: 2011년 1월 5일(수) 12:00~14:00
장소: 용산 해방촌 '빈가게'
인터뷰: 윤영배(이발사) vs 김학선, 단편선
정리: 김학선
사진: 이발사 블로그

김학선: 먼저, 지금 윤영배란 이름 대신 '이발사'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가?

윤영배: 그렇다. 그런데 어차피 다 알고 있어서.(좌중 웃음)

김학선: 음반 사이트나 이런 곳 보면 윤영배의 [이발사]로 표기가 돼있는데, 그럼 이발사의 [바람의 소리]가 맞는 건가?

윤영배: 원래 의도는 로맹 가리(Roman Gary)처럼 낼 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내려고 했던 거다. 내 이름이나 이발사나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발사는 내 별명이기도 하고.

김학선: 그럼 다음 음반은 이발사 말고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건가?

윤영배: 아직 그것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러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단편선: 로맹 가리도 어차피 나중엔 다 로맹 가리가 쓴 걸로 알려지지 않았나. 근데 윤영배 씨는 시작하자마자 들킨 거다.(좌중 웃음) 근데 들킬 수밖에 없는 게 시니즈(레이블)에서 보도자료를 다 윤영배 이름으로 돌렸다.

윤영배: 그것도 그렇고, 영상 만들 때도 내 이름이 들어가고 그랬다.

김학선: 기획사 입장에선 아무래도 윤영배란 이름이 없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윤영배: 어떻게든 작은 거라도 넣어서 팔려고 했던 게 아닐까.(웃음)

단편선: 윤영배란 이름 붙이면 팔릴 거다, 이런 건가?(웃음)

윤영배: 윤영배나 이발사나 다 똑같다.(좌중 웃음)

김학선: 실제로 본인 머리를 스스로 깎는다고 들었다.

윤영배: 10년 정도 됐다. 그거는 네덜란드 갔을 때 애들끼리 서로 깎아주다가 내 머리도 깎게 됐다. 아무나 깎을 수 있다. 다만 내가 감당할 수 있으면. 보여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면.

김학선: 시니즈가 (들국화의) 허성욱 씨 동생(허성혁) 분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요즘 하나음악 소속 음악인들 음반은 다 시니즈에서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음악과 연결이 된 건가?

윤영배: 예전부터 다 알고 지내던 사이다. 예전에 하나음악 사무실이 논현동 안세병원 사거리에 있을 때 성혁이 형이 1994년부턴가, 그 맞은 편 지하에 혼자서 녹음실을 만들고 작업을 했었다. 그러면 가끔 놀러가서 같이 놀고 그 정도로만 교류했었는데, 하나음악이 거기서 이사하고 제주도로 내려가고 하면서 남아있는 친구들이 아지트처럼 저녁마다 모였던 모양이다. 괜히 거기서 쓸데없이 있다가(웃음), 녹음 있으면 거기서 하고 하면서 자연스레 베이스캠프처럼 된 거다. 성혁이 형은 우리가 하겠다고 하면 렌탈보다 우리 것들을 우선적으로 해주고. 나는 성혁이 형하고는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와서 얘기도 많이 하고, 여기서 뭐라도 좀 하면서 놀자, 이런 얘기가 조금씩 나오면서 내가 먼저 혼자서 하게 됐다.

단편선: 그럼 지금 윤영배 씨 말고도 다른 분들도 할 생각이 있는 건가?

윤영배: 하려고 한다기보다는 했으면 좋겠다는 거다.(웃음) 성혁이 형 입장에서는 녹음실도 있고 크게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고 하니까 했으면 좋겠다는 건데 다들 워낙엡.(좌중 웃음) 아직까지 선뜻 한다거나 그런 건 없다.

김학선: 지금 하나음악 쪽에서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는 분은 오소영 씨 정도인 것 같다. 이다오 씨는 오소영 씨 할 때 옆에서 많이 도와주는 것 같고.

윤영배: 다오는 잘 모른다. 다오가 하나음악 들어올 시기쯤 내가 네덜란드에 갔었고, 네덜란드에 갔다 와서는 바로 제주도로 내려가는 바람에 다오하고는 많은 얘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단편선: 네덜란드엔 얼마나 있었던 건가?

윤영배: 2년 있었다. 체류를 하려면 뭐가 있어야 해서 암스테르담 콘서트바리움이란 학교엘 들어갔다. 한 3개월 다녔나? 나이도 있고 이미 음악을 하다 간 상태였기 때문에 1학년 수업을 재미가 없어서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다.(웃음) 그래도 비자가 필요하니까 학교 선생에겐 한국에 좀 갔다 와야겠다고 얘기를 하고 휴학 비슷하게 처리를 했다. 나중에는 친구들도 보고 싶고 너무 한국엘 오고 싶었다. 거기 있는 동안 (윤)정오랑 (박)용준이도 왔었다. 용준이는 그때 결혼해서 신혼여행으로 네덜란드에 온 거였다.(웃음)

김학선: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는 이규호 씨는 뭘 하고 있나?(웃음)

윤영배: 규호는 자기 앨범만 안 하지, 다른 작업들은 그래도 하고 있지 않나? 우리끼리는 같이 작업도 하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다, 하는 얘기는 선명하게 하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을 거다.

김학선: 어렸을 때 얘기를 좀 해 달라.

윤영배: 다들 하듯이 상투적으로, 우리 형이 음악을 좋아했다. 형하고 나이차이가 5살 나니까 내가 초등학생이면 형은 고등학생, 내가 중학생이면 형은 대학생이고 그랬다. 형하고 같이 방을 썼는데 방에 카세트테이프도 있었고 형이 치던 기타도 있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좋아하게 됐다. 중학교 때 친구들 만나면서 같이 듣게 되고, 그때 나오던 [월간팝송] 보기 시작하고. 뭐 뻔한 얘기다.

단편선: 진짜 뻔하다.(좌중 웃음)

김학선: 어떤 음악을 좋아했나?

윤영배: 뭐, 록이다. 1970~80년대 록 음악들. 그때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게 AFKN이랑 황인용 씨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랑 [월간팝송] 정도밖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만나면 취향이나 이런 게 다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가서는 방송부엘 들어갔다. 음악을 같이 듣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들을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음악이 나오는 거였다. 진짜로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 다음에 학교에 LP를 한 장 들고 가서 좀 틀어달라고 했다. 사실 그건 방송부를 구경해보고 싶은 빌미였고, 이후에 방송부에도 들어갔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방송부였고, 점심시간에 음악을 튼 건도 그 해부터였다고 한다. 우리 학교 체육관이 엄청 컸는데 거기서 방송제만 하면 미어터졌다. 방송제가 학교 축제의 꽃이었다.(웃음) 수업도 빠질 수 있고, 포스트 붙인다는 핑계로 여학교도 갈 수 있고 참 좋았다.(좌중 웃음)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도 만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친구를 한 명 알게 돼서 방송제하고는 관계없이 그 친구랑 또 다른 친구 하나랑 셋이서 체육관을 빌려서 8시간동안 음악감상회를 했다.(웃음) 내 앰프 다 태워먹고, 나중에는 둘인가 셋밖에 안 남아있고….(웃음)

김학선: 그럼 그때는 학교에서 가장 많이 음악을 아는 편이었겠다.

윤영배: 그런 편이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그리고 그때부터 슬슬 그룹들이 동네에 생기기 시작했다. 그 한 살 많다는 친구가 먼저 대학엘 가고, 그렇게 알게 된 친구 가운데 한 명이 경북대 일렉스(Elecs)엘 들어가서 거기 연습실도 구경하고 했었다.

김학선: 일렉스가 경북대의 캠퍼스 밴드인가?

윤영배: 그렇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캠퍼스 밴드가 경북대의 일렉스하고 영남대의 에코스(Echoes)인데, 내가 에코스 출신이다. 그거에 관련된 얘기는 (이)한철이가 잘 아는데.(웃음)

김학선: 에코스에서 이한철 씨를 만난 건가?

윤영배: 한철이를 내가 뽑았다.

단편선: 이한철 씨가 그때도 잘 했었나?

윤영배: 어우, 한철이 들어올 때 난리 났었다. 연주를 탁월하게 잘 한다, 이런 게 아니라 오디션 보면 다들 떨고 긴장하지 않나. 어떻게 날 드러낼까, 그런 전략이 없을 때 한철이는 그게 분명했다. 자기가 뭘 준비했는지가 딱 보이는 게 아주 좋았다. 연주야 오디션 보는 애들 다 비슷비슷하다. 에코스 활동하면서 나도 동네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고 했었다. 그때는 그런 공연 같은 게 귀하니까 신입생 오디션 같은 걸 하려면 학교 체육관을 빌렸어야 했다. 지금이랑 1980년대는 정말 다르다.

단편선: 지금은 인디 밴드들 공연하면 관객이 얼마 없는데, 1980년대는 달랐던 건가?

윤영배: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그런 걸 볼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특히 지방은 더욱 그렇다. 또 우리 전에는 더 했다고 한다. 1970년대랑 1980년대는 또 달랐다고 한다. 촌에서는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 부럽지 않은 수준이었다고 하니까.(웃음)

김학선: 당시에 캠퍼스 밴드들은 대학가요제 같은 걸 목표로 했을 텐데 에코스는 나가지 않았었나?

윤영배: 우리 선배들이 '국풍 81'에 나갔었다. 거기서 그룹사운드 대상인가 받았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지방에서는 에코스의 명성이 더 올라갔고, 전설로 남았다고 하더라.

단편선: 그때 연주했던 곡들은 어떤 거였나?

윤영배: 거의 헤비메탈 아니면 하드록이었다.

단편선: 가요 같은 건 없었나?

윤영배: 가요는 생각도 안 하고, 듣지도 않았었다. '좀 이렇게 못 만드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우리가 너무 외국 음악의 정서에 젖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좀 이렇게 연주 못 하나?', '좀 이렇게 녹음 못 하나?' 하는 생각들이 지배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 학번들이 그런 정서의 마지막이었을 거다. 그때 들국화가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고 있었는데, 대구에서 제일 잘 하는 팀이 에코스니까 오프닝 밴드로 우리를 붙였다. 근데 문제는 우리가 들국화를 몰랐다는 거다.(좌중 웃음) 서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몰랐다. TV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마디로 접할 기회가 없었다.

김학선: 가요를 전혀 모르는 데도 유재하 가요경연대회에 나갔다.

윤영배: 그때는 유재하가 누군지도 몰랐다. 라디오라도 신경 써서 들었으면 모르겠는데 만날 밖에 나가서 놀고 밴드 안에서만 있으니까 알지를 못했다. 그리고 통기타치고 노래하는 모임이 있더라도 그 친구들이 하는 레퍼토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학교 후배가 가요 경연대회 포스터가 붙었다고, 돈도 주고 한다고 해서 관심을 가졌다.(웃음) 내가 대학 들어가서 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희한하게 내가 만드는 음악은 또 내가 하던 음악이랑 달랐다. 내가 연주하고 했던 건 조 새트리아니(Joe Satriani)니 반덴버그(Vandenberg)니 이런 거였다.(웃음) 내가 반덴버그를 하면 그게 쫙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김학선: 가장 기타를 잘 쳤었나 보다.

윤영배: 그런 셈이었다. 반덴버그나 조 새트리아니를 하겠다고 아무도 엄두를 못 내고 있을 때 혼자 연습해서 애들하고 맞춰보고 했었으니까. 음악 듣는 걸 엄청 좋아했는데, 집에서 또 음악 듣는 거는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나 바하(Bach),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이런 것들이었다. 스틸리 댄(Steely Dan)도 좋아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가 않았다. 우리 윗기수에 있는 형 하나가 스틸리 댄을 하고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를 하는 걸 보면서 나도 저런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땐 악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스틸리 댄 하나 카피하려면 완전 죽는 거다. 도널드 페이건(Donald Fagen)은 카피가 안 된다.(웃음) 그 형은 그런 걸 치고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를 연주하고 하는데 우리는 엄두가 안 났었다.

김학선: 테크닉이 아니라 그 정서를 만들어내는 게 어려웠던 건가?

윤영배: 그렇다. 다이어 스트레이츠 같은 경우엔 피크를 써서는 톤도 그렇고 음색도 그렇고 그 분위기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그 형은 피크를 쓰는데도 굉장히 훌륭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시에 이펙터 없이는 못 살았는데 그 형은 이펙터 없이도 진짜 쫀득쫀득하게 잘 했다. 그때 관건은 음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펙터도 줄이고 최대한 단출하게 어떻게 소리를 잘 낼까 연구를 하다 보니 그 뒤에 내 톤이 좋다는 얘기도 나오고 그랬다.

김학선: 그래서 유재하 가요경연대회에는 어떤 노래를 가지고 나갔나?

윤영배: 그때 내가 써놓은 곡이 보사노바 같은 거였다. 당시에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나 조지 벤슨(George Benson) 음악도 좋아했는데, 곡을 써보니까 그 비슷한 게 나왔다. 그 곡이 맘에 들어서 솔로도 만들고 다듬고 해서 보냈다. 덜컥 1차랑 2차까지 올라갔고, 3차는 서울에서 봐야 했다. 그때는 대회 규정이 대학생이어야 하고 혼자여야 했는데 그 곡이 혼자서 연주를 할 수 없는 곡이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도저히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반주만 하면 안 되냐고 옆에 한철이 이름을 넣은 거다.(웃음) 그 곡 때문에 한철이도 나한테 처음으로 마이너 나인(9)을 배우면서 텐션에 대한 개념을 배웠다. 그때는 학생들이 그런 코드를 쓸 일도 없었고, 그런 노래가 얼마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철이한테 코드를 가르치고 난 솔로를 하고 그랬다. 서울에 올라오니까 (조)원익이 형이 있었고, 심사위원으로 동익이 형, 뭐 다 있었다. 이문세 씨가 사회를 보고 (김)민기 형도 오고 (고)찬용이랑 (이)소라 왔다 갔다 하고 그랬다. 근데 나는 누군지 다 몰랐다.(좌중 웃음) 촌에서 올라가다 보니까 한철이랑 나는 양복을 입고 올라갔다.(웃음) 다른 참가자들은 다 편한 복장으로 왔는데 우리만 양복을 입고, 또 촌에서 구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기타를 들고 올라갔는데 케이스가 없었다.(좌중 웃음) 우리끼리는 예의가 없다고 다른 참가자들 욕하고 그랬다.(웃음) 거기에서 원익이 형이 둘이 무대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얘기를 하다가 촌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도 있고 또 계속 둘이 연주해야 한다고 얘기를 하니까 그럼 노래를 부르라고 하더라. 그게 원래는 조지 벤슨처럼 허밍만 있는 연주곡이었는데 거기에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하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가사를 써서 올라갔다. 그 노래가 이번 음반에 있는 <어쩐지 먼>이다.

김학선: 그때 제목은 <겨울이 오면>이던데 같은 노래인 건가?

윤영배: 그렇다. 거기 앉아서 바로 가사를 썼었다.

단편선: 지금 가사하고 똑같나?

윤영배: 그렇다. 그때 같이 대회에 참가했던 (김)석준이가 우리 연습하는 걸 보면서 노래 좋다고 먼저 말을 걸어줬고, 연주 끝내고 대기실에 왔을 때는 찬용이가 와서는 노래 죽인다고 하면서 어디 사느냐, 전화번호 알려 달라, 왜 이제 왔느냐, 난리를 피웠다. 심사하는 동안에 찬용이가 낯선 사람들로 무대에 올라서 노래하는 걸 보면서 '맨하탄 트랜스퍼(Manhattan Transfer) 카피 밴드네.' 생각을 했다.(웃음) 내가 아카펠라 그런 걸 되게 싫어했고 그 가운데 맨하탄 트랜스퍼 정도만 괜찮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낯선 사람들은 솔직히 별로 재미도 없었다.(웃음) 근데 찬용이가 기타를 잘 치더라. 솔로는 안 하더라도 통기타로 그걸 다 커버하는 걸 보면서 감탄했었다. 나는 동상을 받았고, 나한테 좋다고 했던 석준이는 금상 받았나 그랬을 거다.(좌중 웃음) 그리고 나는 다시 대구로 돌아가서 학교 실험실에서 생활을 했다.

김학선: 그럼 그때는 음악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안 하고, 취업을 생각하고 있던 건가?

윤영배: 아니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생각을 못 했고, 또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때 내가 실험실에 있고 연구실에 있었던 거는 그냥 그게 좋아서 그랬던 거다.

김학선: 하나음악과는 어떻게 다시 연락이 된 건가?

윤영배: 1년 있다가 원익이 형한테 연락이 왔다. 얘기해야할 게 있다고 5회 유재하 가요경연대회에 참여한 애들을 다 모았다. 원래는 그동안 음반을 만들어 왔는데 5회 대회는 음반을 만들지 못한다는 뭐 그런 얘기였다. 그때 동익이 형이 [장미빛 인생] 영화음악을 하고 있었는데, 찬용이가 날 데리고 거기에 놀러갔다. 가보니까 동익이 형, 필순 누나, 거기 다 있었다. 그렇게 좀 알게 되고 결국엔 몇 년 있다가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내가 학교 졸업을 못해서 9년을 다녔는데, 아버지한테 "나 졸업은 못하겠고 재미도 없고 서울 가서 좀 지내보고 싶다"고 얘기를 하고 올라왔다. 계획도 없고, 그냥 서울구경 좀 하자는 거였다.(웃음) 그래서 서울에서 첫 집을 얻는 게 상수동이다. 그렇게 서울에 와서 하나음악 왔다 갔다 하면서 매일 정오랑 오디오 얘기나 하고, 읽던 책들 얘기, 음악 얘기나 하고 그러면서 지냈다. 그런데 내가 듣던 음악이랑 하나음악 친구들이 듣던 음악이랑은 좀 달랐다.

그때 한철이랑 만날 갔던 데가 백스테이지다. 와~ 백스테이지 가니까 진짜 좋더라고.(좌중 웃음) 진짜로 매일 갔다. 한철이가 그때 집을 구하기 전이어서 상수동 집에서 나랑 같이 살았었는데 둘 다 술을 못 마셨으니까 날마다 거기 가서는 뚱뚱한 미제 콜라 시켜놓고(웃음), 그 눅눅한 소파에서 음악 듣다가 오는 거다. 그때 거기서 처음으로 이른바 모던 록이라는 음악을 듣게 됐다. 그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팀이 틴에이지 팬클럽(Teenage Fanclub)이랑 또 몇몇 팀들이 있었다. CMJ(College Music Journal) 잡지도 되게 좋아해서 그걸 사러 만날 타워레코드까지 가고 그랬었다. 거기에 들어있는 샘플 시디를 동익이 형에게 가져가서 들어보라고 많이 권했었다. 동익이 형이 그때까지는 록 음악 마인드가 없던 사람이다. 내가 그런 걸 워낙 좋아하고, 또 같이 여행 다니면서 차에서 그 시디들을 정말 많이 듣고 하니까 조금씩 변해간 거다. 그런데 그땐 이미 필순이 누나 4집이 준비되고 있던 상태기 때문에 그런 성향이 반영되지는 못했다. 내가 만든 노래를 듣고 동익이 형이 같이 하자고 해서 그때부터 같이 하게 됐고, 또 필순이 누나도 그 전까지는 곡을 안 썼었는데 동익이 형이 써보라고 권유를 해서 그때부터 곡을 쓰기 시작했다. 또 찬용이도 곡을 쓰고 해서 4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철이 1집을 만들면서 그때 처음으로 녹음실에서 편곡이라고 하는 걸 구경하게 됐다. 한철이가 대학가요제에 나갈 때 "넌 안 돼, XX야." 그렇게 말했었는데 덜컥 대상을 받은 거다.(좌중 웃음) 무슨 로큰롤 음악을 만들었는데, 내가 로큰롤 스타일을 되게 싫어한다.(웃음) 아무튼 대상 받고 나서 한철이가 음반 계약을 했는데 당시엔 대기업들이 음반사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한철이도 현대 계열 음반사랑 2장짜리 계약을 하고 서울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는데, 록 음악에 포크 정서를 살짝 넣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동익이 형에게 부탁을 했다. 그런데 작업하는 걸 보면서 우리는 되게 실망했다.(웃음) 우리가 녹음실 환경을 몰랐던 거다. 그렇게 멀티 트랙으로 작업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에 각 트랙을 나눠서 녹음하는 과정이 너무 지겹고 재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얘기는 못 하고 있다가 딱 한 곡은 우리 맘대로 떼로 들어가서 한 번에 해보고 싶다고 얘기를 했다. 드럼도 원래는 (김)영석이 형이 쳤었는데, 그 곡만은 다른 정서가 필요할 것 같아서 김민기 씨에게 부탁을 했다. 그 곡 녹음을 하고선 역시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우리가 너무 모르니까 함부로 환경을 바꿀 수가 없어서 한철이 1집은 한철이랑 나랑 생각했던 방향과는 좀 다르게 나왔다. 너무 잘 다듬어져서 나왔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매끈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김학선: 이한철 씨 1집은 특이하게 윤영배 씨가 작사를 다 맡고, 곡은 이한철 씨가 다 썼다.

윤영배: 한철이가 내 가사를 좋아해서 다 쓰게 됐다. 그때 한철이랑 나랑 날마다 곡이 막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한철이나 나나 평생 할 곡을 그때 다 쓴 거 같다. 이 음반에 들어있는 노래들도 다 되게 오래된 곡들이다. 내가 만날 술만 취하면 부르던 노래들이다. 그러니까 내 친구들은 이 노래들을 다 알고 있고, 내가 부르면 다 따라 부른다.(웃음)

김학선: 노래 제목들이 다 영화 제목들이었는데 그게 나름의 콘셉트였나?

윤영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는데, 그냥 선명하게 이미지가 떠올랐으면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제목을 지었다.

김학선: 아까 잠깐 하나음악 사람들과 듣는 음악이 달랐다는 얘기를 했고, 조동익 씨와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도 장필순 씨 4집에서 만든 노래는 그리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윤영배: 요즘도 가끔 동익이 형이랑 필순이 누나랑 셋이서 4집을 같이 들을 때가 있는데 동익이 형이랑 너무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몰랐다. 동익이 형이 누군지도 잘 몰랐으니까.(웃음) 지금 기억나는 게 당시에 동진이 형 생일에 집에 찾아갔었는데 진짜로 사람들이 많이 와있었다. 현관 밖까지 거적때기 깔고 그러니까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선 상갓집인줄 알고 그랬을 정도다. 방송국 사람들부터 웬만한 음악 하는 사람들은 다 모였는데, 난 혼자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이러지?' 이런 생각을 했었다.(좌중 웃음) 그렇게 모르니까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난 노랫말에 대한 비중도 크게 두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쓴다고는 하지만 동진이 형이 늘 말하는 가사에 대한 얘기도 그때는 내 맘속에 선명하게 와 닿지 않았었다. 몰랐던 거다. 그때 나는 그저 입에 잘 붙고 신선한 표현이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하는 그 정도 생각만을 했었다. 동진이 형 노래 가운데 <눈부신 세상>이란 노래가 있다. 거기에 "눈물 없는 슬픔과 사랑 없는 열기만 가슴에 있네"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런 노랫말, 이런 언어가 이 세상 그 어떤 선언적인, 그 어떤 가파르게 내뱉는 구호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동익이 형이 만든 <TV, 돼지, 벌레>의 정서도 난 잘 몰랐다. 내가 앨리엇 스미스(Elliott Smith)를 되게 좋아하고, 틴에이지 팬클럽도 생각날 때마다 옛날 음반들을 꺼내 듣곤 하는데, 그때 그걸 하나음악 친구들에게 들려줬을 때 그게 어떻게 이해됐을까, 궁금하긴 하다. 당시 하나음악 스튜디오에 조그만 부스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를 거의 나 혼자서 독방처럼 썼다. 한 1년 동안 거기서 문을 닫아도 밖에서 다 들릴 정도로 포티스헤드(Portishead) 같은 것들을 크게 틀어놓고 들었는데 그때는 그런 걸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그걸 가장 이해해주고 같이 시디도 사러 가주고 했던 사람이 동익이 형이다. 집은 따로 있었지만 동익이 형네 집에서 거의 먹고 자고 했으니까 같이 있는 시간이 가장 많았던 이유도 있을 거다.

김학선: 그렇게 같이 지내면서 서로 동화되는 부분이 있었던 건가?

윤영배: 아마 엄청 컸을 거다. 동익이 형의 [동경] 앨범이 막 나왔을 때만 해도 팻 메시니(Pat Metheny) 이랬으니까. 필순이 누나 앨범도 4집은 그렇게 갔고, 5집부터 변화가 있었다.

김학선: 윤영배 씨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윤영배: 내 영향이라기보다 내가 갖고 온 음악들의 영향이었다.(웃음) 내가 또 오디오를 좋아하는데, 집에 가면 조그만 골방에 벽채만한 스피커를 두고 만날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 뭔가 하면서 들은 것도 있고. 그걸 가장 많이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줬던 게 동익이 형, 동진이 형, (권)혁진이 형이었다. 늘 같이 들으면서 가깝게 지냈다.

김학선: 연배가 좀 있으신 분들, 조동익 씨 같은 세대는 새로운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좀 있었을 수도 있을 텐데.

윤영배: 있다. 있을 수 있는데, 동익이 형은 우리처럼 어릴 때부터 음악에 빠져 듣고 새로운 음악을 접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음악하고, 연주하는 친구들은 음악 많이 안 듣는다. 우리처럼 그렇게 열심히 안 듣는다. 폭이 좁고, 딱 자기들 듣는 범위가 정해져 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동익이 형보다 어린 친구들이랑 얘기를 해봐도 얘기가 안 통하는 거다. 우리는 음악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음악을 좋아하고 들어오던 사람들 아닌가. 킹 크림슨(King Crimson)을 얘기하고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를 얘기해도 그냥 알고만 있지 진짜 그 음악은 모른다. 동익이 형이나 동진이 형, 영석이 형은 다 알고 있으니까 형들하고만 더 친하게 지내게 된 거다. 찬용이 같은 애는 "왜 형은 만날 형들하고만 놀고 우리하고는 안 노냐?"고 뭐라 하는데 나는 그러면 니들은 음악 좀 들으라고 얘기한다.(웃음) 보면 빈약하게 시디 몇 장 있는데, 그마저도 자기들이 하는 음악밖에는 없다. (박)인영이 집에 가면 "야, 그것도 없냐?" 이러면서 잔소리를 하는데(웃음), 용준이도 그렇고 다 그렇다. 세대나 이런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김학선: 박용준 씨도 폭넓게 듣는 스타일은 아닌가?

윤영배: 용준이도 그런 편이다. 보통 고전음악 쪽도 그런데 전문 연주인들이 실제로 음악을 많이 안 듣는다. 들을 기회도 별로 없는 것 같고.

김학선: 프로그래밍 같은 건 박용준 씨가 조동익 씨에게 알려줬다고 하던데 그런 쪽에 더 밝은 건가?

윤영배: 그런 건 용준이가 엄청나다. (녹음하고 있던 MP3 재생기와 디지털 녹음기를 가리키며) 난 이런 걸 전혀 모르는데 용준이는 이런 새로운 기기에 관심이 되게 많다. 동익이 형은 전화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고. 우리 가운데 면허증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웃음) 그 산골에 살면서 남자가 그렇게 많은데도 항상 필순이 누나가 운전을 한다.(좌중 웃음) 동익이 형 운전 못하지, (신)진이 형 못 하지, 나 못하지. 그렇게 정서가 다르다. 대신에 우리는 이런 기계는 모르지만 또 다른 기기는 좋아한다.

김학선: 인터뷰 오기 전에 윤영배 씨 블로그를 둘러봤는데 오디오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윤영배: 한때 오디오에 엄청 빠졌었다. 하이텔 시절부터 오디오에 빠져서 계속 교체하고 교체하고, 그런 짓이라고 해야 할 텐데,(웃음) 그런 짓을 많이 했었다.

김학선: 장필순 6집에선 일렉트로닉 음악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것도 같이 공유가 됐던 부분이었나?

윤영배: 5집 때부터 이미 그랬다. 계속 록 음악을 듣고 하면서 동익이 형이 "포크 록 음악을 해보자"고 얘기를 한 거다. 처음에 필순이 누나는 걱정을 많이 했다. 6집을 하면서는 내가 곡만 주고 급작스레 네덜란드로 떠났다. 동익이 형이 전화해서는 "이렇게 내팽개치고 가면 어쩌냐? 이 XX야?" 막 그러는데 난 그냥 알아서 하라고 했다.(좌중 웃음) 나중에 한국 와서 들었는데 알아서 하라는 소리에 동익이 형이 정말 열 받아서 다시는 나랑 작업을 안 하려고 했었다고 한다.(웃음) 내가 그때 6집하고 [바다] 앨범 두 개를 다 내팽개치고 갔었다.

김학선: 왜 그렇게 갑자기 네덜란드엘 간 건가?

윤영배: 그냥, 누구나 가고 싶어하지 않나?(좌중 웃음) 다른 곳도 아니고 암스테르담인데 한 번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김학선: 명목상은 유학이었지만, 여행의 차원이었던 건가?

윤영배: 그런 셈이다. 지금 내가 제주도에 사는 거나 여기 (용산 해방촌) '빈집'에 있는 거나 같은 맥락인 거다.

김학선: 그때 6집 나왔을 때 반응들이 대단했다. 신선하다는 얘기도 많았고, 어떻게 보면 장필순 씨도 완전히 변신을 한 셈 아닌가.

윤영배: 내가 6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햇빛>이다. 내가 누나한테 가장 많이 요구했던 게 목소리에 힘을 빼라는 거였다. 누나 목소리가 원래 힘이 없는 편인데 거기서 더 빼라니까 아주 미치는 거다.(좌중 웃음) 중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밖으로 소리를 내뱉지 말라고 했는데 <햇빛>에서 그 의도가 가장 잘 표현이 된 것 같다.

김학선: 6집 처음 듣고 만족한 편인가?

윤영배: 나도 일렉트로닉 음악을 좋아하는 편인데, <동창>은 좋았고 <헬리콥터> 같은 경우는 그렇게 맘에 들지는 않았다. 동익이 형이랑 같이 음악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부분이 있다. 형이 좋아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건 꽤 많이 다른 편이다.

김학선: 예전에 장필순 씨에게 듣기론 <동창>은 처음에 윤영배 씨가 자기 음반에 넣겠다고 안 주려고 했었다던데 본인의 음반을 그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윤영배: 독집 음반은 아니고 하나음악에서 옴니버스 음반을 만드니까 거기에 넣으려고 했었다. 그걸 갖고 내가 가지고 있는 정서 안에서 새롭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누나에게 많이 했던 얘기는 "자기 곡을 자기가 부르는 게 좋다"는 거였다. 다른 사람의 곡 말고, 누나도 곡을 써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자기가 자기 노래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전혀 특별한 게 아니다. 그게 어떤 형태든, 그걸 만족하든 안 하든,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거고, 자기가 갖고 있는 정서가 있을 텐데 그걸 자기가 표현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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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바람의 소리]는 별다른 예고 없이 나왔다.

윤영배: 이건 진짜 갑작스레 나온 거다. 사실 참 얘기하기가 부끄러운데…. 내가 이번에 서울에 온 게 6월인데, 제주도에 있을 때 동익이 형 집 컴퓨터로 두리반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듣게 됐다. 내가 [녹색평론] 보고 [작은책] 보고, [레프트21]하고 [르몽드], 이런 거 구독을 한다. [프레시안] 같은 곳에서 두리반 기사를 보고 하다가 너무 가고 싶은데 갑작스럽게 갈 수가 없으니까 미치겠는 거다. 어떻게 해야 나도 저기에서 친구들과 지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6월에 무작정 올라왔다. 내가 자전거를 엄청 좋아해서 강원도하고 경상북도 쪽으로 자전거도 탈 겸 올라온 거였다. 서울 와서 맨 처음 한 게 팔레스타인 '가자(Gaza) 프리' 평화연대 1인 시위였다. 그리고 두리반에 처음 간 건 금요 칼국수 음악회를 할 때였다. 제주도에서 왔다고 인사드리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것저것 알아보고 그랬었다. 1인 시위를 하게 되면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됐고, 두리반을 통해서도 알게 됐다. '빈집' 공동체는 '자전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행동하는 친구들 모임인 '발바리'를 통해서 알게 됐다. 원래 내 계획은 3개월 동안 머물면서 활동도 하고 자전거도 간간히 타다가 내려가는 거였다. 좀 있다 보니까 제주도도 그립고, 서울 생활은 정말 안 맞는 것 같아서 바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나중에는 향수병 같은 게 심해져서 비료 포대 들고 남산 가서 나무해가지고 옥상 가서 불을 때기도 했다.(좌중 웃음) 흙 하나 밟을 데도 없고, 정서적으로 도저히 못 있겠어서 마지막에는 만날 남산에 나무하러 갔었다.(웃음) 그런데 '빈집'에 드나들고 하면서 친구를 한 명 알게 되고 연애를 하게 됐다. 여자친구가 생기니까 좀 더 있어야겠더라.(좌중 웃음) 여자친구 데리고 같이 나무해가지고 와서 옥상에서 불 피워놓고 순대에 소주 마시고 그랬다.

그렇게 좀 더 있긴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무기력하게 있기는 싫고 해서 (이)종학이랑 정오에게 녹음이나 할까, 하고 얘기를 꺼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종학이가 바로 성혁이 형한테 녹음실 비워놓으라고 연락을 했다.(웃음) 내가 녹음을 한다고 하니까 그게 용준이랑 애들 귀에도 금방 들어갔다. 얘들은 당연히 자기들이랑 같이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나는 그냥 나 혼자 하겠다고 했다. 좀 무기력한 리듬이나 이런 게 별로 맘에 들지도 않고, 나왔을 때의 그림도 너무 뻔하고 해서, 없으면 그냥 이대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내가 바라는 건 이게 아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거라면 그냥 이걸로 하겠다는 의도였다. 원래는 다른 노래들도 수록할까 했었는데, 한철이가 정규 앨범으로 할 건지 간단하게 할 건지 물어보더니 요즘은 EP 형식으로 많이 한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게 어떤 의도냐고 물어봤더니 하는 사람도 부담 없고 듣는 사람도 부담 없을 거라고 해서, 그럼 이거 만들고 여름에 또 하나 하고, 뭐 그렇게 가볍게 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EP로 내게 된 거다.

김학선: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나?

윤영배: 1주일 정도 녹음했다. 오랜만에 녹음 부스에 들어갔더니 되게 쓸쓸하더라. 나는 사실 멀티 트랙 녹음을 반대하고 반대해왔다. 내가 농담처럼 그걸 꼭 녹음 부스 안에서만 해야 하냐고, 그냥 여기 복도에서도 하고 화장실 옆에서도 하고 하면 안 되겠냐고 얘기를 했었는데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다. 사실 녹음실에서 녹음하는 것도 좋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리라는 개념하고 엔지니어들이 생각하는 좋은 소리라는 개념은 많이 다르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생각을 깨끗이 포기하고 이 시스템 안에서 녹음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녹음을 했다. 하다가 좀 재미없으면 쉬다가 그렇게 총 5일 정도 썼을 거다.

김학선: 블로그에 쓰신 글 보니까, 기존의 스튜디오 녹음실과는 다른 방식을 원하는 것 같았다.

윤영배: 사실 전기 기재로 좋은 소리를 담아내는 게 어려운 거다. 경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멀티는 일단 경로가 복잡하니까 최소한의 경로로 음원을 담아내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바람의 소리], 이것조차도 복잡하다. 10년 전에 나온 건데, SACD가 나올 무렵에 소니에서 DSD라는 또 하나의 방식을 개발했었다. 그게 최단 경로를 담는 방식이었는데 나는 그게 제일 좋았다. 데모 뜰 때의 기분이랑 막상 녹음할 때랑 또 다르지 않나? 난 그게 경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선을 쓰건, 아무리 좋은 SACD로 담건, 경로가 복잡해지면 좋은 소리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튜디오에선 그게 안 되니까, 그렇다고 또 내가 그걸 요구하는 것도 미안하니까 그냥 내가 순응해서 하자고 생각한 거다.

김학선: 좀 전에 잠깐 얘기를 하셨는데, 요즘 하나음악 음반이나 공연을 보면 딱 떠오르는 포맷이 있다. 박용준 씨와 김정렬 씨가 세션을 해주고 하는. 그런 포맷과 연주에서 매너리즘을 느꼈던 건가?

윤영배: 정말 고마운 친구들이고 정서적으로 정말 좋은 친구들이지만, 한 번은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뱉어내고 연주한 것들을 돌아봐야 한다. 변화에 대한 강박, 이런 게 아니다. 안 변해도 되는데, 자기가 한 걸 돌아는 봐야 하지 않나. 그게 꼭 필요한 거다. 연주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너무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무기력하다는 표현을 쓴 거다. 더 잘 할 수 있는 친구들이니까.

단편선: 그럼 이번 EP 같은 경우는 데모를 녹음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한 건가?

윤영배: 특별히 그런 생각보다는, 그게 과연 무슨 차이가 있냐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음반을 녹음하는 걸 너무나 당연하고 태연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음반을 통해서 날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냥 음반에 있는 거다. 내가 똥간 가서 똥 치우고 나무해서 불 때고 하는 것과 똑같은 비중으로 있는 거다. 음악하는 사람이 음악하는 건 당연한 거다. 내가 나무하고 나무를 톱으로 자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한 거다. 밥 먹는 일 가지고 특별하다고 얘기하지 않는 것처럼 음악도 그런 정도였으면 좋겠다는 거다.

김학선: 그렇게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거라면, 이번 음반은 모두 옛날 노래들이라 빠졌지만 다음 음반에선 이를테면 연애를 하고 있는 윤영배 씨의 감정이 그대로 담기는 건가?

윤영배: 저절로 들어간다. 의식적으로 노래를 써본 적은 없다. 그냥 지내다 노래가 만들어지면 만드는 거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색깔을 내려고 그렇게 해본 적은 없다.

단편선: 예전에 같이 활동했던 이한철 씨를 예로 들면, 이한철 씨는 전하려는 메시지가 굉장히 명료하다. 반면에 윤영배 씨 노랫말은 뭔가를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얘기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얘기를 하고는 있는데 명확하게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영배: 그게 의도된 건 아니다. 가사가 제목을 설명하고 있지도 않고, 제목이 가사를 대표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이게 나를 대표하지도 않고, 나 역시 여기에 모든 걸 쏟아 붓는 바보 같은 짓은 안 할 거다.(웃음) 그냥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가사를 쓰는 거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어떤 정서를 담아낸 건 맞기 때문에 떼어놓고 보지는 않는다. 굳이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면 빈약하고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지만 떼어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김학선: 블로그 글들을 봐도 산문식으로 안 쓰고 거의 노래 가사 쓰듯이 글을 쓰던데, 이것도 거의 같은 맥락인 건가?

윤영배: 그렇다. 그렇게 쓰는 걸 좋아하는데, 굳이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대부분 내 글을 보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고 한다.(웃음) 장황하게 쓰는 걸 좋아하지 않고 설명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을 장황하게 하는 게 왜곡시키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아서 위험하다는 생각을 한다.

김학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키 큰 나무>인데, 이 노래도 가사를 몇 번 읽고 나서야 마지막 노랫말의 맥락이 이해가 갔다.

윤영배: 그 노래 지은 게 10년도 더 됐을 텐데, 내가 또 나무꾼이기도 하다. 다음엔 이발사 대신 나무꾼으로 이름을 바꿀까?(웃음) 내가 버릇처럼 요즘은 낭만이 없다고 얘기하는데, 그 노래에 그런 낭만적인 정서가 담긴 거다. 내가 나무가 돼서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상상. 이거 말고 숲에 대한 노래도 몇 개 썼는데 거기에도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노래하느냐가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다. 내가 늘 친구들에게 "그렇게 변기물을 내리고 그렇게 매일 샤워를 하면서 네가 깨끗한 물을 찾냐, 이 XX야"라고 얘기를 하는데(웃음),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다. 나는 겨울 되면 진짜 안 씻는다. 그건 금방 익숙해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어떻게 이 더러운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면서 그렇게 깨끗한 걸 찾을 수 있냐는 거다. 인류역사상 가장 나약한 존재가 지금의 현대인이라는 걸 진짜 절감해야 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씨도 만날 하는 얘기가, 내가 이렇게 나무를 베서 책을 내는 게 부끄러운 일이지만 누구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좀 더 근본적인 근원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한다.

김학선: 생태와 환경에 관심이 많은 건 같은데, 그것 역시 자연스럽게 노래로 표현되는 건가?

윤영배: 그거를 나눠서 생각하는 순간 위험해지는 거다. 나는 그걸 구체적으로 해서 생태나 강에 대해서 노래하지는 못한다. 내가 가진 인식으로는 그건 굉장히 위험한 거다. 불과 백 년 전, 수십 년 전만 해도 누구도 환경, 생태란 말을 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이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노래하고 술 마셔왔지만 누구도 그렇게 노래하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능력이 안 되는 걸 수도 있는데, 나는 음악을 가지고 그런 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청에 가서 싸우고 두리반에서 싸우는 것 아닌가. 책도 보고 공부도 하고. 내 생각을 노래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게 난 되지 않는다.

단편선: 그 얘기는 이것은 생태에 대한 노래, 이것은 환경에 대한 노래, 이렇게 구분지어 노래를 만들지 못한다는 얘긴가?

윤영배: 그렇다. 내가 하는 얘기는 그런 것보다 앞서서 근원적인 것, 그러니까 왜 그렇게 구분이 됐는지 돌아가서 보자는 것이다. 늘 얘기하지만 좀 더 근원으로 찾아 들어가야 한다.

단편선: 아까 음악인이 음악하는 건 나무하고 밥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는데, 음반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뭔가?

윤영배: 음악은 항상 했다. 저녁이 되면 늘 친구들하고 술 마시고 음악을 했다. 집에 모여서 늘 통기타치고 노래하면서 놀았다. 난 또 남의 노래를 못 불러서, 내 노래를 몇 곡 부르면 다른 친구들도 몇 곡 부르고 그런다. 필순 누나 있으면 필순 누나도 부르고 동익이 형도 부르고 그런다. 그거랑 녹음실에서 음반 내는 거랑 뭐가 다르냐는 거다. 넌 녹음 안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난 그러면 다 아는데 뭘 또 녹음까지 하냐고 대답한다. 우리만 알면 되지 않나? 그걸 사람들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있겠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랑 같이 노는 친구가, 정서적으로 나랑 가까운 친구가, 한 달 동안 머리를 안 감아서 냄새가 나도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가 내 노래를 알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사랑의 힘이라는 게….(좌중 웃음)

김학선: 그렇지만 그 노래를 듣고 싶어하고 원하는 팬들이 있지 않은가.

윤영배: 에이, 내 팬이 어디 있나.(웃음)

김학선: 이번 음반에서 노래만큼이나 좋았던 게 기타 연주였는데, 노래보다는 기타 연주가 더 편한 편인가?

윤영배: 노래를 못 하니까.(웃음) 예전에 [겨울노래] 낼 때 형들이 자꾸 나보고 노래를 하라고 하는 거다. 숨도 차 죽겠는데 무슨 노래를 하라고 하느냐고 하긴 했는데, 노래하는 걸 싫어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데, 다만 내가 노래 부르면 친구들이 자꾸 어디를 가서.(웃음)

김학선: 리듬감이 뛰어난 사람이 음악을 잘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윤영배 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인데.(웃음) 특히 어쿠스틱 기타 하나로 만들어내는 리듬이 정말 좋았다. 이런 건 선천적인 재능이라고 생각하나?

윤영배: 어휴, 연습 많이 했다. 학교 다닐 때 진짜 연습 많이 했다. 근데 연습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어서 이젠 연습을 거의 안 하는데(웃음), 그래도 그 정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음악 쪽으로 아는 사람이 친구들밖에 없는데, 그렇게는 하기 싫었으니까 (어쿠스틱 기타만으로 하는) 그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김학선: 서울 올라와있는 동안 노래를 굉장히 많이 썼다고 들었다.

윤영배: 굉장히 많이 썼다.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단편선: 연애하시니까 그런 거 아닌가.

윤영배: 그러니까.(좌중 웃음)

김학선: 그러니까, 내가 아까 말씀드린 게 그렇게 만들어지는 노래에 자연스럽게 연애 감정이 담기지는 않느냐는 거다.

윤영배: 그건 아닌 거 같다. '빈집'에 왔을 때의 인상이나 그런 걸 담고 싶었지만 아마 안 담길 거다. 내가 두리반에서 단편선을 만나고 '빈집'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그게 즐거워서, 결국 내 안의 익숙했던 것들이 나오는 거지, 어떤 걸 생각한다고 그게 직접적으로 나오는 건 아니다. 결국 기분 좋으니까 내가 하던 게 나오는 거다. 그러니까 곡을 써도 늘 하던 게 나온다.

김학선: 앞으로도 꾸준히 음반은 낼 생각인가?

윤영배: 자주 내려 한다. 음반 형식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악기 같은 건 생각을 하고 있다.

김학선: 안 그래도 계속 어쿠스틱 기타와 목소리로만 가는 건지 궁금했다.

윤영배: 구체적으로 생각은 없는데 한 번 다른 걸 해볼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다. 지금 생각으로는 다음에 드럼을 넣어볼까, 하고 있다. 드러머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나나 다른 사람이 치는 거다. 옛날에 필순 누나 녹음할 때 동익이 형이 대충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이드 형식으로 드럼을 친 적이 있는데, 그 소리가 드러머가 내는 훈련된 터치가 아니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녹음 부스에서 그 울림을 잡아내는 소리는 훨씬 작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통 "빡!"하고 나는 소리만을 잡고 다른 톤을 확 죽여 버리는데 난 드럼이 그런 악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드럼이 그렇게 크고 울림통도 그렇게 긴데 "빡!" 이 소리만 나는 악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기신호를 받으면 강조되는 부분만, 피크 뜨는 부분만 왜곡돼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기신호를 잘 받기 위해서는 터치가 작아야 한다는 거다. 그걸 한 번 해보고 싶어서 내가 치든지, 종학이를 시키든지 해서(웃음), 그 소리를 리듬하고 상관없이 넣어보고 싶다.

김학선: 제주도에서 스튜디오 같은 걸 만들 생각은 없나?

윤영배: 돈이 없어서.(웃음) 조그만 방 하나 얻기도 힘든데. 그리고 제주도에선 기존의 스튜디오 같은 걸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주도에서도 여기처럼 소리를 가둬놓고 하는 방식의 스튜디오를 만드는 건 아닌 거 같다. 내가 늘 얘기하는 게 제주도에는 창고 같은 거, 귤 창고 같은 곳들이 많고 또 굉장히 넓다. 천장도 되게 높고. 대부분 돌로 지어져 있어서 난반사 같은 걸 좀 잡고, 마이크 하나로 최단경로로 하고 2채널짜리에 바로 들어갈 수 있게 하면 아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동익이 형이나 친구들이랑 만날 하는 얘기긴 한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니까. 우리가 창고를 살 수도 없고. 그렇게 한 번 해보고는 싶은데 쉽진 않을 거다.

김학선: 지금 제주도엔 누구누구 내려가 있는 건가?

윤영배: 내가 8년 전에 제일 먼저 내려갔고, 5년 전에 동익이 형이랑 필순 누나, 3년 전에 동진이 형 내려왔다. 진이 형도 있고.

김학선: 조동진 씨와 조동익 씨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기가 있었다.

윤영배: 동익이 형이 좀 아팠다. 그냥 좀 아팠던 거다. 지금은 괜찮다.

김학선: 그분들은 음악 활동 안 하시는 건가?

윤영배: 우리는 항상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좌중 웃음) 우리가 항상 주장하는 게 그거다. 이게 음악이다. 사는 게 음악이지. "네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뭘 노래할 건데?"라고 얘기한다.

김학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음악 활동이란 걸 하는 분은 장필순 씨 정도인 것 같다.

윤영배: 필순 누나가 일도 제일 많이 한다. 밭일을 정말 열심히 한다.(좌중 웃음) 필순 누나는 장갑 하나 끼고 골갱이 하나 들고 아침에 나가면 안 들어온다.(웃음)

김학선: 그럼 그분들 가운데 음반을 발표한다거나 그런 계획이 있으신 분은 없는 건가?

윤영배: 있어도 나한테는 말을 안 해준다.(웃음) 난 잘 모르겠는데, 있지 않을까?

김학선: 혹시 이번 EP에 조동익 씨가 관여한 부분이 있나? 그런 얘기가 있던데.

윤영배: 나도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런 거 없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지? 아주 크게 보면 관여한 거겠지만(좌중 웃음), 실질적으로 관여한 건 없다. "미안하지만 내가 좀 갑자기 이런 걸 하게 됐다"면서 동익이 형한테 음반을 보냈더니 좀 놀란 거 같더라.(웃음)

김학선: 듣고 뭐하고 하던가?

윤영배: 동익이 형이 마이너 뽕을 되게 싫어한다. 마이너 코드를 되게 싫어해서 네 번째 곡 같은 걸 얘기하면서 "그런 걸 꼭 해야 되냐?"고 뭐라 하더라.(좌중 웃음) 노래를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이거는 왜 이렇게 했냐? 이거는 또 왜 이렇게 짧게 끊었냐? 이거는 더빙을 왜 안 했냐? 노래를 다시 할 생각은 없냐?, 계속 뭐라고 해서 그냥 귀찮다고, 됐다고 했다.(웃음)

단편선: 거기에서 살아도 돈은 필요할 텐데 그런 경제적인 부분은 어떻게 충당을 하나?

윤영배: 동익이 형이나 동진이 형은 저작권이 있고, 나 같은 경우는 가끔 공장이나 식당에 가서 일을 하기도 한다.

단편선: 농작물을 팔거나 하진 않나?

윤영배: 하루 종일 밭일을 하는데, 하루 종일 해도 그게 그렇게 잘 되지를 않는다. 난 다섯 고랑짜리 밭 다섯 개 있는 걸 한 해에 두 번 정도 나눠서 하는데, 그거를 다 해도 그냥 우리 먹는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밭일하고 나무만 해도 시간이 다 간다. 완전하게 자립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소비를 하면서 살려고 하는 거다. 좋다고 해서 하는 거긴 하지만 일단 술·담배를 하니까.(웃음) 그러다 보니 항상 슈퍼에 의존하게 되고(좌중 웃음), 쌀을 생협 같은 곳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의존하는 거고, 어떻게 보면 늘 모순이다.

단편선: 제주도에도 요즘 레이블도 생기고 공연장도 생기고 있는 것 같다. '부스 프로젝트'도 있고 그런데 그런 움직임에 대해서 알고 있나?

김학선: '스테핑 스톤 페스티벌'도 있고 그렇다.

윤영배: 사실 그러면 안 되는데, 시골에 살다 보면 하루 종일 일해야 한다. 나무를 때서 살다 보니까 이맘때는, 가을부터 3월까지는 매일매일 나무를 해야 한다. 하룻밤에 나무가 되게 많이 들어간다. 그래야 그나마 온기라도 느끼면서 잘 수 있으니까. 겨울에는 나무 하는 게 제일 큰일이고, 2월 말이나 3월부터는 모종하고 밭도 가꾸고 그런 일들이 1년 내내 반복된다. 해떨어지면 그때 한 잔 하고.(웃음) 그러다 지치면 책이나 좀 보고 음악이나 좀 듣고 그러면서 보내니까 시내에서 무슨 일이 있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소식을 알 길이 없다.

김학선: 제주도에서의 삶이 음악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나?

윤영배: 쉽게 말을 못하겠는데, 당연히 영향을 주긴 줬을 거다. 하지만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음악은 절대 중심이 아니라는 거다. 제주도에서의 삶이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기보다 그냥 제주도의 삶이 다다. 살아있었으니까 이거라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건방지게 여기서의 삶을 음악에 집어넣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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