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세대의 자유와 감정에 관하여. 단편선. (장판마켓15 포럼 : 하나의 청'소'년 대안 기본소득 @전주 발제 中) Writing

우리 시대/세대의 자유와 감정에 관하여

발제자: 단편선 (음악가, 자유기고가)

기본소득 청’소’년 네트워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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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실물적인 데이터를 인용하며 유식한 척 할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물론 근거가 될만한 자료를 제시하고 그에 맞게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의미없다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나, 현재 우리─여기서 ‘우리’라 함은 나와 내 또래의 친구들, 혹은 함께 이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같은 세대의 대부분을 지칭하는 것이겠습니다─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해 굳이 더 많은 자료로, 더 많은 사실확인으로 더욱 마음에 비수를 꽂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생각하는 까닭에서입니다(그보다 먼저, 실은 그렇게 데이터를 활용할 능력이 없기도 하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혹은 우리의 처지에 대해 정치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책은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저명한 『88만원 세대』로부터 시작하여, 그런 책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이미 무엇인가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최소한 어떤 감정들을 공유하고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를 모두에게 ‘같다’라 말하는 것이 무리임을 알고 있음에도, 저는 이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늘 물질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사람입니다. 정신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물질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각합니다. ‘개인’ 보다는 ‘집단’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의지가 있는 한 개인이 ‘배가 고프지 않다, 배가 고프지 않다’며 자기최면을 걸어 배고픔을 견딜 수는 있을지 모르나, 집단적으로 그런 의지를 발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늘 ‘물적 기반’ 내지는 ‘인프라’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그럼에도 저는 왜 감정이란 말을 썼을까요? 거꾸로, ‘물적 기반’ 내지는 ‘인프라’는 어딘가로 부터 주어지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며,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나가는 데는 늘 최소한의 결단이 따르게 됩니다. 주체의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저는 ‘주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에 감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어떤 감정에 대하여’는 아닐 것입니다. 차라리 ‘(어떤 감정도) 없음’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에서, 저는 저를 포함한 대다수가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감정이 아니라, 그것의 없음이라 생각합니다. 이곳에선 도무지 감정이란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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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우리는 종종 불안정노동─비정규직, 계약직, 아르바이트, 청년실업 등으로 표상되는─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노동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당연히 노동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 즉 노동이 아닌 노동입니다. 그것은 노동이되, 노동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족으로부터 노동을 한다 인정받질 못합니다. 최소한 정상적인 노동 내지는 노동다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음악가 내지는 자유기고가라는 직업을 엄연히 가지고 있음에도 가족 내에선 실직자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강도와는 크게 연관이 없습니다(많은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음악가나 자유기고가도 생각보다 강한 노동강도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단지, 아주 단순히, 정규직이 아닌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인정했을 때, 그렇다면 불안정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동은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노동이다’와 ‘노동이 아니다’의 사이를 정처 없이 오갑니다. 누군가는 유목민(nomad)이라 부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난민에 불과한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노동에 대해서만 말했으나 실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라 저는 생각합니다. 주거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안정주거라는 말을 종종 쓰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월세방, 하숙집, 고시원 등이 주로 그것에 해당될 것입니다. 최근 정민우가 쓴 『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에서는 청년세대에 있어 불안정주거란 과연 어떤 의미인가를 잘 짚어내고 있는 책입니다. 흥미롭게도 정민우는 불안정주거라는 상태/상황에 처한 주체들을 일컫어 ‘유령’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유령이란 호칭은 아무래도 재미있는 것입니다. 유령은 단순히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없음(부재함)으로서 있는(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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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현재 한국이란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근본적인 질서란 실은 이런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저는 최근(2011년) 있던 경영계와 노동계 간의 2012년도 최저임금에 대한 협상과정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저임금에 대하여, 별로 높지도 않은 인상폭을 제시하던 노동계에게 경영계는 “(…)제시한 최저임금수준은 다수의 영세 기업들이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며 거부의 뜻을 밝혔습니다.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결과적으로 2012년도 최저임금의 협상도 쥐꼬리만큼의 인상으로 끝이 났습니다.) 경영계의 입장에서 볼 때, 아마 합리적인 구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았을 때, 이는 곧 최저임금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지 않고선, 실업률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지 않고선, 이렇게 불안한 상황을 유지하지 않고선 현재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라는 경영계의 수줍은 자기고백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불안해질수록, 우리는 공고해지리라.“

그렇게 만들어진 불안을 적잖이 떠맡는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임을 제가 누차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세대는 불안을 떠맡는 것을 넘어, 그 불안과 함께 자라온 세대입니다. 우리 세대에게 불안은 낯설지 않습니다. 초·중·고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본다면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공교육 시절에만 한정지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취업을 우리는 ‘관문’이라 이야기 하는데 익숙합니다. 여러 국가고시에서도 경쟁률이 높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최근 같이 저녁을 먹은─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큰 회사에 다니는─사촌누나 역시 개인적으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서 시행하는 보수교육은 너무 수준이 낮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참고로 사촌누나는 아이가 둘이나 있습니다. 아이가 둘이나 있고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는 이가 이유 없이 학원을 다닐 리는 없습니다. 원래 공부를 좋아하는 성격일 수도 있으나─하지만 그렇다면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지 굳이 학원에 다닐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한편으로 외부적으로 공부를 강제하게 만드는 구조 또한 존재할 것입니다. 여기서 공부란 흔히 쓰는 말로 ‘자기계발’입니다.
 
일부를 제외하고서, 대부분 언제든지 난민 내지는 유령의 신세로 추락할 여지를 지닌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하우스 푸어(house poor)라는 말이 있듯, 심지어 중산층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습니다─일단은 그로부터 자기 몸뚱아리 하나라도 건사하기 위하여 자기계발에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강제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앞에서 우리 세대에게 “불안은 낯설지 않습니다”라 한 바 있습니다. 불안이 곧 악(惡)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많은 이들에겐 기회로 인식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되려 우리는 불안에 적합하게 훈련/훈육 되어왔다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앞서 언급한 난민과 유목민의 사이, 그 간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서동진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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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저는 감정에 대해 쓰겠다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의 없음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물론 희로애락 같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인 이상, 그것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지속은 아주 짧습니다. 대개 일시적인 감정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불안은 다릅니다. 그것은 없음에 대한 감정이고, 아주 오래간 지속되는 감정입니다. 그것은 감정이라기보다는 상태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불안이란 것이, 결국 우리를 ‘가장 사적인 개인’들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계발이란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시험을 남이 대신 봐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그것 자체가 부정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시험의 결과란 결국 개인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문제가 출제되는 시험이란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공평하다 볼 수 있습니다. 시험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열심히 안 하고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조건 개인의 책임으로 수렴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구조 자체가 실은 알리바이고 트릭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유란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질 않으며, 그 외에는 허용되질 않습니다. 자기계발의 주체는 결코 타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트릭입니다. 실은 그 바깥으로 우리는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바깥을 섣불리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세대’라는 구조의 효과입니다. 이를테면 그런 마음을 가질 수도 없게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미리 항구적인 불안을 깔아두고선─곧 언제든지 난민 내지는 유령의 신세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협박을 하면서─자기계발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게 만드는─하지만 그 책임은 모두 개인이 지게 하는─구조.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지를 택할 수 있을까요? 가령,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선택할 수도 있겠으나 주어진 선택지가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고르거나 아예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유의 범주를 확장해볼 필요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유란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억압되고 있는 자유는 공적인 활동을 할 자유가 아닙니까? 우리에게 억압되고 있는 감정은 연대의식과 공동체성은 아닙니까? 자연과 생태에 있어, 우리는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불안해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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