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 국가, 정치적 공간 (그리고 공천). Writing

* 공천심사 이야기가 서두와 말미에 왜 나오는지 의아해하실 분이 있을 것으로 안다. 참조하시길. 여야 공천심사에 관한 논평을 요청받았으나 결과적으론 강정과 관련된 글이 되어 지면에 실리진 못하게 되었다. 아마 여야의 공천에 대해 그저 쇼에 불과하고 한바탕 개지랄에 불과하다는 개인적인 입장 때문에 글이 이렇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공천에 대해선 지금도 입장이 같다. 관심도 없고, 전반적으로 바보 같고, 저질이며, 처음부터 게임으로서의 가치도 없었다. 어쨌거나 강정 이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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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심사에 대한 논평에 앞서 우회로를 택하도록 하자.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군과 주민들이 큰 충돌을 빚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적어도 최근 일주일 동안, 강정은 한국사회의 가장 커다란 쟁점이었다. 마을의 상징물과도 같은 구럼비바위를 강제로 폭파시키겠다는 해군과 경찰, 건설회사에 마을주민들, 그리고 활동가들이 맞서면서 급기야는─2008년의 용산을 연상케 하는─폭력상황들이 발생하면서 강정은 순식간에 한국사회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안보, 생태, 민주주의 등 다양한 아젠다와 직간접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강정문제는 우파와 진보세력, 좌파를 포함한 다양한 정치적 포지션을 지닌 이들에 의해 회자되었고, 또한 해석되었다. 그 중 일부는 직접 강정에 개입하고 있기도 하다(ex: 개인 활동가들, 시민들, 진보 정치인들, 혹은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개인적으론 강정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 정말로 모두들 무사하길, 그리고 꼭 승리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도로 지금의 시점에 와서야 강정이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강정이 해군기지의 새로운 후보지로 떠오른 시점은 2007년 4월이다. 그리고 지금은 2012년 3월이다. 5년의 시차가 있다. 그 5년간 강정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활동가들이 주민들과 함께 강정에 대한 다양한 캠페인을 조직했으며 또 적잖은 지식인들이 강정에 대한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비록 개표요건 미달로 부결되긴 했으나 2009년에는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투표를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강정은 전사회적 이슈는 아니었다. 시발점은 2011년 9월 2일, 중무장한 경찰 1,000여 명이 마을에 투입된 시점이었다. ‘공권력에 의한 극한의 폭력’이 발생한 시점부터 강정은 비로소 전사회적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일주일은 그러한 폭력이 정점으로 치달은 시점과 맞물린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만약 ‘공권력에 의한 극한의 폭력’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강정은 아젠다로서의 가치와는 별개로 여전히 전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이기도 하다. 강정뿐만이 아니다. 평택 대추리에서도, 용산에서도, 쌍용차 공장에서도 역사는 동일한 궤적을 따라 반복되어왔다. ‘공권력에 의한 극한의 폭력’이 발생하지 않으면 이 사회는 움직이질 않는다. 나는 여기서 한번 절망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상황이 야기하는 두 번째 국면 때문에 다시 한 번 절망한다. ‘공권력에 의한 극한의 폭력’을 막아내는 동시에 그를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만들어야한다는 논리는 너무도 쉽게 ‘국가권력’을 ‘우리 편’의 것으로 가져와야한다는 논리와 맞닿는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이는 ‘반MB'라는 단일한 노선으로 귀결되며,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를 지지한다. 심지어 강정을 떠받치고 있는 하나의 큰 사상적 흐름인 생태주의가 지금 ’반MB'를 외치고 있는 이들과 정치와 삶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견지하고 있음에도 대중적으로는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단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이다. 1) ’반MB'가 아닌 다른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가능성 2) ‘국가’가 아닌 다른 정치공간을 상상할 가능성.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2)의 문제다. 지금 모든 운동은 강정으로 집중된다. 심지어 국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다른 정치공간─이를테면 인권운동, 청소년운동, 협동조합운동, 지역운동, 예술운동, 생태운동, 평화운동 등─에서 활동하는 역량있고 지성적인 활동가들마저도 강정 앞에선 국가를 겨냥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공권력에 의한 극한의 폭력’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윤리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들이 강정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기존의 공간은 어떻게 되는가? 기존 제도권에서 멀리 떨어지면 떨어져있을수록 기반은 불안정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핵심 중 몇몇이 빠지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이다. 겨우 공간이 열렸다 해도 다시 닫히는 것은 순식간이다. 하지만 강정의 대의를 고려할 때, 그들을 비난하는 것도 옳지만은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슬퍼지는 상황만 반복될 뿐이다.

한국이란 나라의 현대사를 되짚어보았을 때, 현재의 시점에서 현실적인 집권가능성이 있는 세력이라면 누가 집권하건 간에 이러한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란 점은 이미 상식에 가깝다. 당장에 한명숙 등, 소위 야권이라 불리는 세력의 정치적 지도자마저도 강정이나 한미 FTA에 대해선 “원론적으론 동의하지만 폭력은 안 된다”는 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도 모든 영역이 (개인적으로 쓰기 좋아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깔때기’ 식으로 한 아젠다에 집중하게 되는 현상이 반복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모든 아젠다의 대상이 ‘국가’로 집중된다는 것이 문제다. 이 프레임 자체를 깨지 못하면 더 이상의 뺄 수 있는 진도란 없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자면 공천과정에서 누가 붙었느냐니, 누가 떨어졌냐느니에 대해 온 국민이 과민하게 반응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정치자금을 시민들이 아닌 소수의 자본가와 기업, 대지주들에게 충당하는 사회에서라면 공천이 정당하고 합리적이고 공개적인 절차에 따라서만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가깝다. 그래서 공천이란 기본적으로 정치엘리트들의 ‘쇼’다. 그래서 너무 많은 기대는 금물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기대를 하지 않는 이들이라 해도 혹은 거의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이들이라 해도 결국 공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에선 ‘국가’를 경유하지 않고는 거의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로 ‘국가’ 외의 정치적 공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은 맞고 그럼에도 다양한 정치적 공간들이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노력 여하에 따라 현실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반은 틀리다. 그렇다면─최소한 이런 상황 전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라면─우리들의 역할은 무엇이 되어야하는가? 하지만 역할을 논하기에 우리가 너무 슬픈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 또한 맞다.

덧글

  • 이글 2012/03/13 17:51 # 답글

    공권력에 의한 극한의 폭력이 아니죠
    반대세력의 극한의 깽판이 옳은 표현입니다
  • 이글 2012/03/13 18:10 #

    평택 대추리, 용산, 쌍용차 공장
    이 장소들에서 공권력의 의한 극한의 폭력이 발생했다라..
    헛웃음만 나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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