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방귀] 나는 중산층의 자식이다 Writing

<<칼방귀>> 2호에 기고한 글을 늦게서야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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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산층의 자식이다 / 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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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나는 중산층의 자식이다. 그것도 꽤 안정적이고 돈이 많은. 남의 개인정보를 노출할 이유는 없으니 자세히 말하진 않겠으나, 부친은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으며 모친은 현대무용을 전공한 평범한 중산층의 가정주부였다.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그녀가 10여 년 전 악성종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발병했던 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재학 중일 무렵이었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적잖은 돈을 썼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 사태로 전국적인 경기침체가 있기 전까지 적잖은 돈을 모은 우리 가족의 경제는 그녀의 치료비를 댈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어쨌건 그녀는 5년여에 걸친 투병 끝에 사망했다. 후에 그때를 기점으로 집안의 가세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들었다. 그녀가 동네성당을 다니며 만든 인적 네트워크가 그 무렵부터 작동하지 않아 자금의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망하지 않았다. 부친이 종사하는 직종이 경기순환의 리듬을 많이 타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던 까닭에서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서울의 목동에서 살았다. 흔히 강남 3구와 묶어서 이야기되고 하는 바로 그 목동이다. 목동은 원래 서울의 변두리로서 도시빈민들이 살아가던 동네였으나 재개발로 인해 빈민들은 쫓겨나고 내가 태어난 해(1986년)부터는 아파트 분양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목동은 ‘신시가지’였다. 반포에서 태어난 나는 그해 바로 목동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그리고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목동의 아파트촌에서 보내게 되었다. 청소년기까지 나는 목동 바깥의 세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남세스러운 이야기긴 하지만 청소년기의 나는 공부를 곧잘 하던 학생이었다. 특히 언어와 수학에서 늘 고득점을 획득했다. 하지만 원래 영특해서라기보다는 자라오면서 공교육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사교육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던 가정환경 덕분이지 않았나 싶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도 그룹 과외 같은 것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관심 있었던 것은─그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판타지라거나 신화, 동화, 만화, 우주에 관련된 SF, 지구의 역사, 동물과 식물, 뭐 그런 것들이었다. 수많은 데이터가 책 속에 있었으므로 나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몽상을 펼쳤다. 때로는 동생과 함께 가상(이를테면 침대를 우주선 전투기로 설정한다던지 하는 식)의 상황을 설정해놓고 역할놀이를 하기도 했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으므로 가족들도 크게 꾸짖진 않았다. 그러나 모친은 교육열이 높았고, 결과적으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좋든 싫든 수많은 사교육을 받아야했다. 양친 모두가 자수성가한 타입인지라 자녀에게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야한다는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건 그 와중 나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대한 교습을 받을 수 있었고 모친의 고급예술에 대한 취향도 일부 물려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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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처음 만들어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쯤이었다. 왜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아무튼 처음 만든 곡은 한강에 관한 레이브 음악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시절에도 동네 공터에서 자주 멜로디를 흥얼거렸으나 어느 정도의 완결성을 가진 음악을 만든 것은 그때가 최초였다. 그 전까지 나는 만화를 그렸다. 그 시기의 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나는 일본만화의 광팬이었다. 특히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카우보이 비밥, 멋지다 마사루와 이나중 탁구부와 같은 컬트적인 만화를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정용 게임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는데,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것보다는 공략본을 읽으면서 게임의 서사와 세계관을 따라가는 것이 더욱 취향에 맞았다. 함께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던 친구의 집에 가 너바나를 처음 들은 것도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던 듯하다. 여하간 당시의 내 꿈은 만화가였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는 동안 중고등학생들이 만든 연합 만화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동인지를 출간하기도 했고 코스프레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왠지 모르게 만화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만화 보는 일에도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소위 ‘리듬 액션 게임’이라 불리는 오락실 게임들이었다.

비트 매니아, 댄스 댄스 레볼루션 등의 게임을 하며 나는 자연스레 일렉트로닉한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엔 이미 쉽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도구(tool)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중학교 3학년 한 해 동안 나는 틈만 나면 음악을 만들었다. 당시 만들었던 음악들은 주로 하우스, 유로비트, 투스텝, 드럼 앤 베이스에 가까운 전자음악들이었다. 주로 프루티 룹스 등의 프리웨어를 통해 음악을 만들었으며 프리웨어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와레즈 등을 이용한 불법 다운로드를 받은 도구들을 이용했다. P2P 서비스를 통해 수많은 음원을 역시 불법 다운로드 받기도 했다. 물론 용돈의 대부분을 음반을 사는데 투자하긴 했으나 그보다 더 많은 음악들을 불법으로 들었다. 그때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도덕적인 저항감도 전혀 없었다. 수많은 음악들을 섭취하며 내 취향은 주기적으로 바뀌어갔다. 그 취향의 변천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할 생각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음악을 듣거나 만드는 일은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점차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수백 개의 공개되지 않을 곡을 썼다. 때로는 학원에 가지 않고 곡을 썼다. 실은 학원에 가기 싫어서 곡을 썼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공부에 큰 취미가 없었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직접 공부의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었다. 늘 반강제적으로 학원과 그룹과외와 기타 등등에 나가야했다. 아직 정치적 의식 같은 건 없었던 때라 그런 강제적인 학습에 큰 저항감은 없었으나 어쨌건 나는 그보다는 놀고 싶었다. 음악은 놀이의 좋은 도구였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나는 조금 더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때까지 나는 공식적으론 수학교사가 되고 싶다고 이야길 하고 다녔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나는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 가족에게 이야길 했다. 그때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간 가족에게 받아온 스트레스가 터진 것일 수도 있고 그냥 노는 것이 좋아서 앞으로도 평생 놀면 좋겠다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때 그렇게 나이브했다. 당연히 가족은 난리가 났고 나는 일주일 정도를 밤마다 얻어맞았다. 하지만 맞은 보람이 있었는지 바로 그 다음 주부터 나는 서울대에 다니는 음대생에게 화성학 기초를 배울 수 있었고 피아노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클래식 작곡을 공부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개새끼인 것은 그 다음해,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그 해 겨울방학에 다시 음악을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클래식 말고 밴드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모던 록이나 브리티쉬 팝, 컬리지 록 같은 것에 심취해있었다. 그리고 화성학은 솔직히 너무 어려웠으며 피아노를 끈기 있게 연습하기란 너무 힘들었다. 나는 이게 그냥 노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해보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놀기 위해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했는데 음악을 전공하는 것은 노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없어졌고 음악을 전공하기 싫어졌다. 나는 클래식 작곡을 공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가족은 한 번 더 난리가 났고 나는 또 일주일 정도를 밤마다 얻어맞았다. 하지만 맞은 보람이 있었는지 나는 클래식 작곡 공부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리고 ‘고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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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를 한 시점은 2월 중순이었다. 날은 추웠고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개강을 하기 전 일주일 정도를 집에서만 머물렀다. 돈이 없어 바깥에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정말로 능력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능력이 없었다. 그간의 대학생활의 초점은 모두 노는 것에 맞춰져있었다. 나는 음악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모든 경쟁을 회피했다. 학점은 바닥이고 토익은 공부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다못해 자동차 면허 따위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학생회 활동엔 열심이었다. 간단한 이유에서였는데, 학생회를 하면 ‘공식적’으로 놀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겨 후배의 등에 업혀 갔다. 노느라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연애도 엉망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용돈을 받고 살았다. 용돈을 받고 사니 아르바이트를 할 이유도 없었다. 간혹 돈이 모자라는 경우에만 조금씩 단기 아르바이트를 뛰었을 뿐이다. 노는 것 외에, 내게는 아무런 경험도 없었고 기술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막 제대한 나는 암담했다.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용돈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아직 학기가 조금 남아있던 지라 조금의 유예는 가능했지만 그 학기가 지나간다 해도 살 길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내 능력을 체크했고, 그나마 조금 나은 것이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만드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관련된 일거리를 찾았다. 불러주는 곳은 한 번도 마다하지 않고 모두 다 갔다.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다. 기타와 우쿨렐레를 가르쳤다. 한편 글을 써서 이곳저곳에 기고하기도 했고 친구들과 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3년 정도를 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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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4월 20일 첫 번째 정규음반을 냈다. 제목은 [백년]이다. 나는 지금 [백년]을 다시 들어보고 있다. 남들에겐 이 음반이 어떤 의미일지 모르겠으나 내겐 일단은 ‘돈’이다. 음반을 제작하는데 든 비용이 800만 원이 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음반의 제작비 중 절반 정도를 클라우드 펀딩을 통해 받은 후원금으로 메웠다. 나머지는 사비로 처리했다. 2011년 7월부터 내가 기타강습, 우쿨렐레 강습, 기고, 공연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벌어들인 대부분의 돈은 이 음반의 제작을 진행하는데 쓰였다. 마침 1월부터 3월까지는 비수기(겨울)라 거의 공연수익이 없었다. 내 통장에 있는 돈은 늘 20~30만 원 선을 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를 지켜낸 것은 돈이 없으면 아예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돈이 전혀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컸다. 통장 잔고가 심리적 마지노선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무력감에 빠져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차라리 생동성 실험에라도 지원할까 여러 번 생각했다. 그래도 음반이 나온 지금은 일단 100만 원 선에 잔고를 맞춰두고 있다. 나는 조금씩 돈을 모아 올해가 가기 전엔 200만 원 정도까지 통장 잔고가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음악가를 ‘직업’으로 삼은 뒤 3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음악가로 사는 몇 가지 테크닉을 익혔다.

첫째로 최소한의 안정성을 유지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기타 등의 악기 강습을 끊지 않고 있다. 다만 악기 강습이나 아르바이트가 가장 주업이 되면 더 이상 음악을 할 순 없게 될 것 같아서 일주일에 두 타임은 넘지 않게 세팅해놓고 있다. 나는 낙원상가에서 일을 하다 혹은 실용음악학원에서 기타를 가르치다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고, 결국 음악을 그만두는 선배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그렇게 되고 싶진 않다.

둘째로 벌 땐 악착같이 벌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어떤 곳도 마다하질 않는다. 돈이 되건 안 되건 상관하질 않는다. 물론 돈이 되면 좋고 좋은 기획이라면 더욱 좋다. 그러나 혹 돈이 안 된다고 해도 인적 네트워크를 늘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음악가에겐 큰 자산이다. 나란 개인의 정치적, 미적인 신념과 위배되지 않는 한에서 나는 모든 곳에 움직인다. 쉬지 않는다. 일주일에 일주일 모두 공연할 수 있으면 해야 하고 하루에 네 번 공연이 있어도 버텨내야한다. 그래서 가끔은 노동자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것이다. 전업음악가라면 정말 열심히 살아야한다. 바쁜 와중에 음악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하는 것은 물론이다.

셋째로 가난에 익숙해져야한다는 것이다. 실은 정말 열심히 벌어봤자 솔직히 몇 푼 안 된다. 일례로 작년을 생각해보면 내가 진짜 가장 많이 번 달에 번 돈이 150만 원쯤 되었던 것 같다. 진짜 못 벌었던 달은 30만 원 정도를 벌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그 중간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한다고 보면 된다. 내게는 어엿한 직업이지만 남들 아르바이트 하는 거나 실은 도찐개찐이다. 차는 굴리기 어렵다. 집을 사는 것도 쉽지 않다. 결국 스탠더드보다 눈을 낮춰야 한다. 가난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사는 기술을 습득하고 익혀야한다. 사실 한국이 그렇게 격이 높은 사회가 아닌지라, 돈을 많이 안 들이면서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방법들이 뒤져보면 다 있다. 이를테면 값싸면서도 질 좋은 밥집이라거나 저렴한 빈티지 가게들, 늦게까지 여는 마음편한 술집, 커피맛이 훌륭하면서도 크게 비싸지 않은 카페들 같은 거. 찾아보면 다 있다. 안 찾아서 문제인 것이다.

넷째로 이 모든 것을 조율할 자신만의 중기적인 경제계획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변수가 많은 직업이라 장기계획은 세우기 힘들다. 그러나 최소한 1년 정도의 계획을 세워놓는 것이 좋다. 비수기인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서 언제부터는 레슨을 늘릴 계획을 잡아야한다거나, 성수기에 번 돈을 무절제하게 쓰지 않거나. 실제로 작년부터는 그렇게 계획을 잡았고 계획을 잡아두어서 음반에 돈을 쓰는 와중에도 파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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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지금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실은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내가 교육수준이 높고, 예술에 대한 취향이 있으며, 자녀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중산층의 자식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를 늘 의심한다. 실은 의심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가령 나는 지금도 집에 얹혀살고 있다. 서울의 월세는 비싸다. 월세와 관리비, 식비를 합친다면 아마 나는 지금보다 아주 적게 잡아도 40~50만 원 정도는 더 벌어야할 것이다. 따로 받아쓰는 돈은 없으니 어느 정도는 자립했다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반자립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부친이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로 내가 집에 보태야 되는 생활비도 없다. 아마 집이 지금보다 많이 빈궁하여 내가 생활비를 보태야하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음악가를 직업으로 삼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현재를 얘기할 것도 없이, 내가 어릴 적부터 누려온 수많은 문화자본의 혜택으로부터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까 나는 우연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훨씬 더 축복받은 환경에서 음악가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나보다 자산을 많이 가지지 못한 가정의 자식들도 이 씬에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들의 생활은 과연 어떨까?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다. 나만 해도 통상적으로 주 7일 모두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은 노동하고 있다. 이 생활에는 딱히 정해진 휴일도 없다. 그럼에도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보다 좋지 않은 조건에서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자립음악생산조합의 운영위원이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은 공식적으로 “작은 규모의 음악생산자들이 자유롭게 음반과 공연 등 음악과 관련된 작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는데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음악생산의 인프라를 구축해나가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홍대앞뿐만 아닌 다른 지역에도 새로운 씬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 조금 더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1) 누구나 쉽게─저렴하게─만들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여 2) 결과적으로 모두의 음악생산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를 ‘아래로부터’ 지켜나가자/만들어나가자는 것이 목표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정치적’인 운동(movement)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에 동의하며, 또한 이러한 운동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운동의 목표가 ‘정당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운동을 만들어나가는 당사자인 내가 과연 ‘누구나’나 ‘모두’나 ‘보편’인지에 대해서는 늘 의구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조합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나는 지속적으로 음악은 공공재이며, 자본이 강요하는 시장의 질서란 것이 음악의 본질과는 별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음악의 본질적인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또한 음악은 결과적으로 모두의 음악이 되어야한다 말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당사자인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는 나의 계급에 대한 배반인가 혹은 내게 상징자본으로 기능할 아이덴티티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레토릭에 불과한가? ‘부잣집 도련님들의 유희’라는 비판에서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확실한 것은 내가 중산층의 자식이란 것밖에 없다.

덧글

  • 2012/09/26 23:1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9/27 12:1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구름사람 2012/09/27 08:44 # 답글

    잘 읽었습니다. 단편선이라는 게 단편소설선집?
  • 단편선 2012/09/27 12:12 #

    오 그런 것 같습니다
  • 료리료리 2012/09/27 19:27 # 답글

    자기 얘기인데도 꽤 날카롭게 쓰셨네요 그러기가 쉽지않은데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갑니다
  • 단편선 2012/11/02 01:29 #

    원래 저것보다 훨씬 더 개새끼인데 엄청 착한 놈으로 그려놓았음 ^^
  • 미운오리 2012/11/05 20:32 # 답글

    오랜만입니다요. '벌땐 악착같이 번다' '어떤 곳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얘기 같군요 ㅋㅋㅋㅋㅋ 이제 막 자립을 시도하는 프리랜서 작가이자 강연가로서, 말이죠.
  • 미운오리 2012/11/05 20:33 # 답글

    그나저나 고엔지 쪽에 혹시 연줄이 좀 있으신지? ㅋㅋ
  • 단편선 2012/11/12 18:19 #

    연줄이 있다고 하면 있다고 할 수 있고 없다고 하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죠? 혹시 뭔가 일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danpyunsun 지메일 쪽으로 연락주시길.
  • 여뱅 2012/11/16 10:12 # 삭제 답글

    오! 기타 강습도해????
  • 단편선 2012/11/16 11:04 #

    하고 있음 ㅎㅎㅎㅎㅎ 그런데 요새는 바빠서 일단 한팀만 하고 있는데 겨울엔 조금 더 늘리긴 할 듯? ㅎㅎ
  • 5745977 2013/03/27 04:21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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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31 12:22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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